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하얼빈역에 울려 퍼진 총성은 조선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관통했고, 안중근 의사는 “코레아 우라(대한제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박문 격폐(擊斃: 쏴 죽이다) 이듬해 2월 14일 일본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안의사는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그로부터 35년이 흐른 1945년 8월 15일, 안의사 일생 소원대로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지만, 유해는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에 반장해 달라”는 유언과 달리 오늘도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기억되고 있는 대한의 영웅,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광복을 외치며 죽음 앞에서도 고개 숙이지 않았던 안중근 의사의 기개를 그린 소설 하얼빈이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영웅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지난해 말 김훈 작가가 쓴 소설 하얼빈을 정독했습니다. 한번 펼쳐 든 소설 하얼빈은 마지막 장면에서 눈을 떼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거사 전후의 짧은 나날들에 초점을 맞추어 안중근과 박문이 각각 하얼빈으로 향하는 행로를 따라갑니다. 안중근의 삶에서 가장 강렬했을 마지막 며칠 간의 일들이 극적 긴장감을 지닌 채 선명하게 재구성됩니다. 난세를 헤쳐가야 하는 운명을 마주한 미약한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는 작가의 시선은 더욱 깊이 있고 오묘한 장면들을 만들어냅니다. 이등박문으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의 물결과 안중근으로 상징되는 애국청년의 순수한 열정이 부딪치고, 살인이라는 중죄에 임하는 한 인간의 대의와 윤리가 부딪치며, 천주교인으로서 신앙심과 속세 인간으로서 지닌 증오심이 맞부딪칩니다. 작가는 인간 내면에서 벌어지는 복합적인 갈등을 특유의 간결한 문체로 펼쳐내며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시야를 한 단계 높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단순히 요약정리 되기 쉬운 역사적 기록과 실존 인물의 삶을 작가의 철저한 상상으로 탄탄하게 엮어져 소설 하얼빈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올해 1월 초, 함양 문화예술회관 소강당에서 아내와 영웅 영화를 봤습니다. 소설 하얼빈이 뮤지컬 영화 영웅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예술회관 소강당은 영화감상 전용 극장이 아니다 보니, 음향효과 전달이 미흡해서 못내 아쉬웠습니다. 특히 뮤지컬 노랫말이 명확하게 들리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이런 아쉬움이 남아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영화 영웅 OST(Original Sound Track: 영화 필름에서 소리가 녹음된 가장자리 부분) 전체 곡을 들었고, 뮤지컬 영웅 시츠프로브(Sitzprobe: 뮤지컬이나 오페라 공연 전에 배우들이 의상 분장 준비 없이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사전 연습하는 것)를 감상했습니다. 그래도 뭔가 허전하여 설 연휴 온 가족이 진주에 있는 영화 전용 극장에서 한 번 더 영웅을 감상했습니다. 며칠 사이 두 번 연속 감상한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이리하여 저의 인생 영화 영웅 다시 보기 2시간은 눈 깜작할 사이 지나갔고, 관람료와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뮤지컬 영화 영웅은 총 17곡의 노래가 영화 중간중간 들어가 있습니다. 첫 곡 서사부터 마지막 곡 동양 평화까지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로 영웅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모든 곡의 노랫말이 뜻깊고 강렬했습니다. 이 중 ‘단지동맹,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 영웅 장부가’ 노래는 백미였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자유와 평화이며, 나라의 얼이 왜 빠져나갔으며, 우리 겨레가 무엇을 어떻게 빼앗겼는지를 배우들은 열정적 노래로 쏟아냅니다. “내 조국의 하늘 아래 살아갈 그 날을 위해 수많은 동지들이 타국의 태양 아래 싸우다 자작나무 숲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간절했던 염원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뜨거운 조국애와 간절함을 담아 저 안중근 이 한 손가락 조국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만주벌판 광활한 눈밭 자작나무 숲에서 펼쳐진 단지동맹 노랫말에서 국토회복 조국광복의 염원과 굳센 의지를 보았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에 이어서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 노래 “내 아들, 나의 사랑하는 도마야 떠나갈 시간이 왔구나. 두려운 마음 달랠 길 없지만 큰 용기 내다오. 내 아들, 나의 사랑하는 도마야, 널 보낼 시간이 왔구나. 멈추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큰 뜻을 이루렴. 십자가 지고 홀로 가는 길 함께 할 수 없어도 너를 위해 기도하리니 힘을 내다오. 천국에 네가 나를 앞서가거든 못난 이 어미를 기다려 주렴. 모자의 인연 짧고 가혹했으나 너는 영원한 내 아들.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너를 안아봤으면, 너를 지금 이 두 팔로 안고 싶구나”에서는 참았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을 잃고 싶지 않은 조마리아와 조국을 잃고 싶지 않은 안중근, 굳은 결심을 어찌할 방도가 없기에 흐느끼는 어미와 아들의 모습에 저 또한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이어지는 “하늘에 맹세한 장부의 큰 뜻 내게 남겨진 마지막 시간 내가 걷던 이 길 끝까지 가면 이룰 수 있나, (중략)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으니 죽어도 그 뜻 잊지 말자 하늘에 대고 맹세해 본다. 하늘이시여 도와주시오. 우리 꿈 이루도록 장부의 뜻 이루도록” 영웅 장부가 노래에서 인간 안중근은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용기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천부에 의지합니다. 전율과 감동으로 전해오는 한순간 한 장면도 놓치지 않기 위해 푹신한 의자에서 자세를 흐트러뜨릴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곡 동양평화 배경음악과 함께 오르는 엔딩 크레딧(Ending Credit: 영화 제작과 관련된 상세 정보로 배급사, 제작사, 감독, 주연, 조연, 조명, 음악, 소품, 의상 담당, 등 수많은 제작진 이름이 흘러 지나감)이 끝날 때까지 한참이나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학창 시절,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안중근은 조선 침략 원흉 박문을 저격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고한 선비이자 탁월한 토왜의병 참모중장이었고 투철한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유묵은 대부분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고, ‘박문 격폐’ 이후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썼습니다. 미완성 ‘동양평화론’에서 ‘동양의 중심지인 뤼순을 영세 중립지대로 정하고, 한·중·일 세 나라가 참여하는 상설위원회를 설치해 분쟁을 미리 방지하고, 3개국이 일정한 재정을 출자한 공동은행 설립과 공동 화폐를 발행해 어려운 나라를 서로 돕고, 3국의 젊은이로 공동 군대를 편성하고, 상대의 언어를 가르칠 것 등 로마 교황청도 이곳에 대표를 파견해 국제적 승인과 영향력을 갖게 하자’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혜안임이 분명합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년 삼월 첫날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오로지 그 시대 치열한 삶을 산 고고한 선비 영웅들 덕분입니다. 삶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동양 침략을 막고 세계 평화를 위한 거사’라고 외친 코리안 세계 미인 하루빈 안중근 선생의 당당한 모습을 떠올리며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으로서 당연한 본분)을 가슴에 새기고, 고마움과 존경의 마음으로 머리 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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