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기억해 내는 것인가 봅니다. 지난해 자루 속에 저장해둔 무에서 장다리꽃이 피네요. 기특하게도 지난봄의 아름다웠던 시간을 기억해내고는 자루 속 어둠을 더듬으며 노란 꽃대를 올리고 있습니다. 봄은 인사하는 거라며 봄까치꽃(개불알꽃)이 꽃대를 흔들고, 봄은 팡팡 터뜨리고 색을 더하는 거라며 꽃다지가 노란 꽃을 피웁니다. 엊그제 내린 봄비에 수선화는 푸른 혓바닥을 쏘옥 내미네요. 아직 꽃샘추위도 남아있고 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는 하지만 계절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없어 보입니다. 땅 위 아래에 있는 모든 생명은 거역할 수 없는 왕의 명령이라도 받은 듯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도 이맘때면 곶감일은 모두 끝내고 감나무 과수원으로 달려가 전지작업을 할 때이지만 올해는 곶감을 아직 다 만들지 못했습니다. 입춘 우수 지나고 경칩이 다 되어 가는데 산책길에 개구리 울음소리 들리는데 아직도 하우스에서 대봉곶감을 숙성시키고 있답니다. 어찌된 일이냐구요? 글쎄 말입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대봉곶감을 만든 지 10년이 넘은 것 같습니다. 만들기 쉬운(?) 고종시 곶감만 만들다가 홍시용으로 먹는 큰 대봉감도 곶감이 되지 않을까? 시험 삼아 한번 만들어볼까? 하고 한 박스 열 박스 오십 박스... 만들어 보고는 노하우가 쌓이는 만큼 매년 생산량을 한 동씩 두 동씩 늘렸습니다. 그리고 어떤 해는 고종시보다 대봉곶감을 더 많이 깎은 해도 있습니다. 어른 주먹만큼 큼직한 대봉곶감을 접하면 두 번 놀라게 됩니다. 크기에 한 번 그리고 깊은 맛에 또 한 번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생산자의 경영 측면에서 무유황 대봉 곶감은 그다지 수지가 맞지가 않습니다. 워낙 크고 수분이 많은 감을 말리다보니 원하는 대로 보기 좋은 상품이 되는 것은 절반도 안 되고 나머지는 흑곶감이 된다던지 분이 너무 많이 나서 유통하기가 상당히 어렵게 됩니다. 그동안 고객이 주먹만한 대봉곶감을 받고 깜짝 놀라는 것에 재미를 들였는데 이 것도 전체 수지가 안 맞으니 재미를 좀 줄여야겠습니다. 앞으로 대봉곶감은 생산량을 반의반으로 줄이고 고종시곶감을 더 만들려고 합니다. 대봉곶감은 너무 크다 보니 말리고 숙성시키는데 정성이 많이 들어갑니다. 흑곶감을 만들지 않으려면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요즘은 날씨가 옛날 같지 않아서 앗차! 하면 때깔이 가 버립니다. 건조와 숙성이 잘 되어 선물상자에 들어가려면 맑은 날 하우스에서 햇볕 샤워를 오랫동안 시켜야하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원치 않는 흑곶감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고종시 곶감은 찰지고 성질이 무난해서 무유황이라도 대봉처럼 흑곶감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맑고 햇살 좋은 날 하우스에서 대봉곶감 햇볕샤워를 시키고 해가 넘어갈 즈음 냉동 창고로 옮겼습니다. 내일도 그리고 적어도 며칠만 이라도 오늘처럼 날이 맑아야 합니다. 앞마당 크로커스 피기 전에 늦은 대봉곶감 담으려면 말입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