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큰언니의 부탁으로 열흘 넘게 아침마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를 도와주러 다닙니다. 얼마 전에 극구 사양을 해도 아이들 갖다 주라며 빨간 사과 세 알을 손에 쥐어주셨지요.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문득 젊은 시절 세 들어 살던 주인집 할머니가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 만나는 할머니 이야기는 천천히 쓰기로 하고 그때 썼던 글을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집집마다 알람시계 하나쯤은 다 있을 것이다. 둥글거나 네모난 것, 혹은 조금 크거나 깜찍하고 작은 것 등 각자 개성과 관심에 따라 그 모양과 크기와 색깔은 달라도 말이다. 내게도 바쁜 아침을 재촉하는 십 년도 더 지난 파란색 알람시계가 하나 있었다. 이곳에 이사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전지가 다 됐다는 이유로 장롱 깊숙이 치워버렸지만 십 년을 같이 지낸 정을 쉽게 뗄 수 있었던 것은 그 알람시계가 아니더라도 새벽 다섯 시를 정확하게 알려 주는 또 하나의 든든한 알람시계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드르륵 덜컹 문 여닫는 소리, 저벅저벅 계단 오르내리는 소리, 쓰윽 싹 싸악 마당 쓰는 소리. 그리고 ‘이 노옴’으로 시작하는 사발막걸리보다 걸쭉한 주인집 할머니의 욕하는 소리는 내 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처음엔 이런 소리가 너무나 싫고 짜증스러웠다. 조금만 소리를 낮추거나 옆방 사람을 생각해 주면 되는데 저 노인네가 생각이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온갖 불만 섞인 마음이 목젖까지 차올랐는데 한마디 하는 것을 접어버렸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세입자의 처량함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주인 할머니의 소리에 차츰 익숙해져 갔고 그 소리는 오히려 내 생활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잠이 많던 내게 할머니의 알람에 맞춰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간다거나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하며 꼭 해야 할 일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아래 위층의 다른 할머니들로부터 “새댁은 참 부지런하다”라는 말까지 듣게 했다. 습관이라는 것, 익숙함과 편안함이란 것은 참으로 무서운 녀석인 것 같다. 모든 일에서 만 시간을 일하면 전문가가 되고, 10년을 종사하면 한 분야의 전문가 소리를 들으니 말이다. 나도 십 년간 할머니의 알람 소리를 듣고 생활하면 아침 루틴이 생겨 작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싫고 불쾌했던 주인 할머니의 모든 소리가 시간이 지나서 내게 좋은 결과로 나타나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할머니의 계단 내려오는 소리가 따아악 따아악 치익 하며 아주 늘어지는가 싶더니 ‘후유’하는 한숨 소리 하나가 더 붙었다. 마당 쓰는 소리며 창고문 여닫는 소리, 고양이 쫓는 소리는 아예 들리지도 않는다. 이층 할머니께 여쭈어보니 몸이 많이 안 좋아서 아들 집에 갔는데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평소 건강해 보였는데 일흔이 넘은 분이 혼자 생활하는 것은 참 외롭고 힘든 일이었으리라. 그래서일까. 할머닌 텃밭을 아이들 사랑하듯 너무나 열심히 가꾸셨다. 며칠 전엔 할머니가 텃밭에서 깻잎을 따고 있기에 말을 걸었더니 “새댁아, 깻잎이나 좀 따다 무거라. 그라고 니가 처음 이사왔을 때 부쳐 준 깻잎전 와그리 맛있더노” 하셨다. 바쁘다는 핑계로 깻잎만 얻어먹었는데 할머니 돌아오시면 깻잎전을 부쳐서 드려야겠다. 티격태격 아웅다웅 하다가도 막상 눈앞에 없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지나 보다. 페르나두 페소아도 『불안의 서』라는 그의 저서에서 일상의 모든 것들에서 어느 하나가 빠지면 그립다고 했는데 나도 그렇다. 있을 때 잘하라는 노랫말이 생각난다.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눈앞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가 아니라 평소에 옆에 있을 때 잘해야 하겠지. 더 늦기 전에. 주인 할머니가 걱정된다. 보고 싶다. 새벽을 열며 나를 깨우던 할머니의 모든 소리가 자꾸만 귓전을 울리며 눈가에 흐릿한, 흐릿한 잠자리 날개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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