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병원과 대중교통을 제외하고는 드디어,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의 습격으로 평범하게 보내왔던 일상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무척 당황했었지만, 3년이란 시간동안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면서도 견디면서 살아내었다. 소소한 일상, 곁에 있는 사람들, 내가 누려온 모든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경험하면서, 삶의 가치와 방식이 조금씩 달라졌다. 터벅터벅 코로나의 긴 터널을 걸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현재의 삶은 팍팍하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이럴 때 시와 그림이 주는 위로와 치유의 힘을 빌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뭉크(Edvard Munch, 1863-1944)에게 세상은 상실과 불안과 우울, 두려움으로 자신을 옥죄어오는 공포 그 자체였다. 병약하게 태어나 5살에 어머니의 죽음을, 14살에 누나 소냐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의 정서적 학대, 광기어린 사랑 등 그가 마주한 삶은 그의 목덜미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그의 그림 대부분을 음울하게 지배하고 있다. 그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뭉크 하면 대표작으로 ‘절규’를 떠올린다. 핏빛 하늘의 노을을 배경으로 다리 위에서 귀를 막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한번 보기만 해도 뇌리에 콕 박힐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일상을 살면서 어찌할 수 없는 불행 앞에 속수무책인 우리의 모습이기도 해서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림은 따로 있다. 인간 내면의 고통과 불안에 절규하면서도 뭉크는, 그래도 살아내야 할 내일이 있기 때문에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절규’의 작가가 ‘태양’을 그렸다니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원래 빛은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것이니까. ‘태양’은 그의 나이 50에 의뢰받아, 오슬로 대학 100주년 기념관의 대형 벽화로 그린 작품이다. 기념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벽면 전체를 그림이 채우고 있는 그 정면에 ‘태양’이 있다. 백야의 나라인 노르웨이는 겨울이 길다. 그 긴 겨울이 지나고 봄에 떠오르는 첫 태양을 그린 듯한데, 둥근 태양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흠칫 숨이 멎을 정도이다. 어떤 새해맞이 해돋이 사진이 이보다 더 강렬할 수 있을까.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거대하게 떠오르는 태양은, 거대한 바위산과 푸른 초원, 그리고 마을을 누리누리 비추고 있다. 그 어디에도 어둠은 없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존재자가 우리의 신산한 일상을 어루만져 주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일까, 불안 증세와 정신병에 평생 시달리면서도 뭉크는 여든이 넘도록 오래 살았고, 노르웨이의 1000크로네 지폐에 자화상과 ‘태양’이 그려져 있을 정도로 국민작가로 사랑받고 있다. 곧 입춘이다. 이번 겨울은 너무나 추웠고 길었다. 그러나 산 너머로부터 봄이 오고 있는 걸 알기에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나짐 히크메트의 시 중에서)이란다.희망의 마음으로, 다가오는 내일에게 손을 내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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