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양극화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로, 경제적으로 중간계층이 사라지고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는 현상이 20년간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기초자치단체간 광역단체 간 뿐만아니라 세계의 각 국 간에도 벌어지고 있다. 또한 경제적 양극화를 넘어서 인간의 보편적 욕구이자 권리인 안전의 여건마저도 양극화 되고 있다. 도시란 인간의 창조물이자 인류의 주된 정주공간인 동시에 정주환경이다. 과거 수메르 문명의 중심지 우르에서 시작된 도시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영향력을 점차 증대시켜 왔다. 도시가 갖고 있는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현재 전 세계인의 76%, 우리나라 인구의 91%가 도시에 살고 있다. 미래 학자들은 인구의 도시유입은 더 진행될 것이라고 말한다. 작은 도시는 점점 소멸되고, 또 갈수록 도시화가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도시가 인류 발전을 견인한다는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기본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문명이 시작된 이후 도시는 인재의 집적과 이를 통한 혁신으로 문화, 과학, 경제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런데 그는 어느 정도 규모가 인재 유치를 통한 혁신에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 인구 100만 이상의 대도시를 최소 기준으로 암시할 뿐이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 중세 피렌체, 베네치아, 근대 버밍엄, 보스턴, 현대 뉴욕,파리,런던,도쿄,밴쿠버,싱가포르 등 그가 성공 사례로 제시한 도시는 다양한 규모의 도시다. 현대 도시 내에도 규모의 차이가 크다. 2023년 정부예산 639조 원 규모로 어렵게 국회 문턱을 넘었다. 주민들은 국가의 사업들이 무슨 근거로 어떻게 결정되는지 알 수가 없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산다고 하지만 소통은 어렵다. 필자는 도시계획을 전공한 사람으로 오래 전부터 ‘작은 도시’를 생각해 봤다. 한 눈에 보이는 도시, 손에 잡히는 도시 말이다.  2015년 바이오 제약 산업의 중심지인 스위스 바젤에 간 적이 있다. 스위스 제2의 도시인 바젤이 인구가 10만 명 남짓밖에 안된 작은 도시지만 노바티스와 로슈 등 유수의 글로벌 기업을 배출한 도시다. 놀라운 건 고층 건물이라고는 10층 남짓의 제약회사 건물뿐이고, 대부분 5층 이하의 저층 건물인 점이었다. 스위스 사람들은 도시가 너무 크면 통제할 수 없다며 의도적으로 작은 도시를 만든다고 한다. 루소의 견해에 따르면 작은 국가가 더욱 바람직한데, 규모가 작은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더 수월하게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도시를 추구할 수는 없을까?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의식주, 교육, 의료와 같은 요구가 해결될 수는 없을까? 출세하려면 서울로 가야한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 들을 수는 없을까? 오히려 서울에서 성취를 이룬 사람이 지방으로 돌아와 작은 도시를 만들 수는 없을까? 주민들이 모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과정에서 대표성을 인정받은 사람이 광역의원도 되고 기초의원도 되고, 그 연장선상에서 국회의원이 될 수는 없을까? 국가에서 시작되어 특별시, 광역시, 시군구를 거쳐 주민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아니라, 주민에서 시작되어 시군구, 특별시, 광역시를 거쳐 국가로 이어지는 구조가 될 수는 없을까? 거주 단위로, 직장단위로, 아니면 아무런 구획도 없이 자원봉사 단체를 만들어 주위에 힘든 사람들을 도울 수는 없을까? 주위에 불행한 사람이 있는 이상 내가 행복할 수 없다고 느낄 수는 없을까? 성공이 클수록 행복한 것이 아니라 욕망이 덜 생겨야 행복한 것은 아닐까?   내 재산이 많아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가난한 사람이 덜 생겨야 행복한 것은 아닐까? 큰 도시의 효율성과 같은 단일한 가치로 빌딩을 이루고 있는 반면, 작은 도시는 다양한 가치로 숲을 이룬다. 대도시의 삶을 사는 게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허상은 아닐까?’ 작은 도시를 추구하자.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과 소통하자. 그리하여 따뜻한 세상이 만들어지고, 먼 훗날 내가 그 작은 도시에서 삶을 위로받을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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