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는 것은 새로운 숫자를 쌓는 일이다. 2023년의 문 앞에 서는 순간 365일의 장엄한 시간을 쌓았던 2022년을 잠시 뒤돌아본다. 그 쌓인 날들의 틈바구니에서 부서지고 흩어져 잔해가 된 말들의 공허함이 먼저 밟히고 그 말들이 뒤척이며 일으킨 무수한 잡음들이 허망하게 짚혔다. 인간의 모든 말들은 각자의 입에서 각자의 방식과 입장과 가치관과 양식과 세계관대로 흘러나오므로 공명정대가 일치하는 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2022년은 유난히 의문부호가 따라붙는 말들이 소음처럼 자욱하게 떠돌았다. 거칠고 날이 선 말들, 맥락이 모호한 말들, 대립이 되어 충돌을 야기하는 이말저말들이 뒤섞여 종회무진 날아다녔다. 이제 그 말들도 2022년과 함께 지나간 시간의 틈 사이에 퇴적되어 누군가의 부름에 응해 한번씩 인용되거나 세간에서 잊혀진 채 소멸될 것이다. 이쯤에서 아르헨티나의 설치 미술가 마르타 마누힌의 “모든 예술가들의 꿈,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내부 갈등이 없는 곳” 이라고 해석한 바벨탑을 소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애초 인간의 언어는 하나였으나 신이 인간의 오만함을 벌주기 위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흩어버린 바벨탑의 신화는 결국 소통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소통은 일방향과 쌍방향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상대방에게 음성적으로 말을 전달하는 일방향은 소통이 아니다. 소통의 의미를 배제하고 발화자의 의도를 구현하기 위한 작위적인 말들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반면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견해를 설득적으로 구사하는 쌍방향의 소통은 온화하게 문이 열린다. 타의 의견이 납득이 되면 자신의 의견을 접을 줄 아는 것이 성숙한 소통의 태도다. 그러나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다른 쪽의 말은 거세게 배척하는 사회의 면면은 바벨탑의 신화가 재생산되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 과도한 말의 생산과 소비는 피로를 안기고 외면을 부른다. 새해에 발을 내딛으며 “Happy new year”라는 문장을 떠올렸다. 이 말은 사람들이 어떤 행복을 추구하든 간에 좋은 기운이 깃들기를 바라는 주문같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가족에게 행복이 깃들기를 바라고 주변사람들에게 깃들기를 바라고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깃들기를 바라면서 사회적으로는 불특정 다수의 귀에 닿는 모든 말들에 해피한 기운이 들기를 바라던 것이다. 새해에는 텍스트로 오는 말이든 영상이나 음성으로 들려오는 말이건 그 말들이 정제되고 정선되어 사람들의 심기가 구겨지거나 접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견해가 서로 다르더라도 동전의 양면처럼 정당했으면 좋겠고, 공격과 방어의 말들도 그럴 수 있겠다고 수긍이 가는 말이었으면 좋겠고, 어떤 말이든 사납지 않고 왜곡이나 억지나 무례를 범하지 않는 그런 말들이 떠다녔으면 좋겠다. 말이 분노를 야기하고 적대감을 생산하고 의문을 증폭 시키고 물의를 빚어내기도 하지만, 또 말이 마음을 정화시키고 위로를 주고 격려가 되고 용기를 주고 공감을 불러내고 존경과 존중을 심기도 하는 것이다. 멀리 보고 넓게 보고 여파를 생각하고 듣는 사람을 존중하고 마음을 헤아린다면 좋은 방식을 택할 것이고, 눈앞의 것에 연연하고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고 잘 모르고 포용력이 부족하다면 좋지않은 방식을 택할 것이다. 이제 새로운 365일이 쌓이는 구간으로 들어섰다. 2023년은 어떤 장면을 대하든 수긍이 되고, 누구를 향하든 그 응원과 지지가 타당하고 다른쪽 사람들에게 폐가 되지않는 그런 해가 되었으면 하는 꿈같은 이상을 품어본다. 아무튼 모두모두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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