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불안과 스트레스를 가지고 살아간다. 인간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그 두려움의 실체는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일 것이다. 그것 때문에 마음의 기쁨과 평강을 다 잃어버리고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가정에도 평안이 없다. 일반적으로 부부싸움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돈’ 때문이고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남자는 돈을 잘 벌어다 주는데, 만날 싸우는 소리가 나더란다. “야, 치사하다! 사람이 밥 만 먹고 사냐? 밥만 먹고 살아?” 이런 식이다. 또 어떤 남자는 돈은 못 벌어다 주지만, 나름대로 아내를 끔찍이도 사랑해 주었다는데, 그 집도 싸우더라는 것이다. “야, 지겹다 지겨워! 사랑만 하고. 어떻게 사냐?” 들어보면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돈도 못 벌어다 주고 사랑도 못해 주는 집은 어떨까? “네가 해 준 게 뭐가 있는데? 이날 이때까지 해 준 게 뭐가 있냐고?” 그러면서 박박 대드는데, 정말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돈도 잘 벌어다 주고 사랑도 잘 해 주는 부부는 어떨까? 이 집이야 말로 정말 싸울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이 집도 역시 싸우더란다. “그래, 너 잘났다. 너 잘났어! 내가 더러워서 다시는 너랑 상대 안 해!” 그러면서 대판 싸운다나? 부부싸움을 해도 그냥 고분고분하게 적어도 상대방의 자존심만은 안 건드리면서 싸우면 좋겠는데, 꼭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야만 속이 시원해지는가 보다. 결혼생활을 오래 한 여자들이 잘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진즉 이혼을 했어야 하는 건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서 산 걸 생각하면 정말 억울하고 끔직하다. 끔찍해!” 그런 말을 들은 남자들은 또 가만히 있을까? “누구는 좋아서 이때까지 붙어서 살았는지 알아?”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받아치는 말이 있다. “그럼, 당장 이혼해!” 그 말을 들은 남편도 지기 싫으니까, “이혼하자면 누가 못할 줄 알고?” 그러다가 진짜 이혼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말로 이혼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는 얘기다. 필자의 어머니랑 아버지께서도 노상 그러셨다. 그런 걸 보면,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다. 월급쟁이들은 노상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냐면서 미래에 대해서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다. 불안하기는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방선거나 총선, 대선을 앞둔 정치인들은 살아남게 될지 몰라서 불안해한다. 그런가 하면 공부하는 학생들도 노상 시험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 스트레스다. 초등학교 아이들이나 유치원 아이들도 학교 가기 싫다고 하고,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하는 걸 보면 그 불안의 정도를 알만 하다. 결국 불안과 근심, 걱정과 염려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근심과 염려를 극복하는 지혜는 없는 것일까? 성경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불행과 근심 걱정 염려들을 이겨낼 수 있는 지혜는 소유에 대한 포기이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라는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자!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물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재산을 증식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땅에 쌓아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말씀이다. 성경은 우리의 보물을 딸에 쌓아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두라고 교훈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영원한 것에 착념하라는 말씀이다. 어디 물질 뿐이겠는가? 권력이나 권세나 명예도 다 마찬가지다. 나를 위해서 욕심을 부리게 되면 누구처럼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신을 포장하거나 과장을 하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결국 내가 사는 동안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건 내 이름 석 자 뿐이다.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휴가는 버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몸의 피로는 물론이고 마음의 욕심까지도 다 버리고 올 일이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면 일할 직장이 있고, 일터가 있다면 감사할 일이다. 우리는 이렇게 버리고 살아도 다시 남아서 돌아오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버리고, 버리고 버려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버리고 포기하는 것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타인을 위해서 나누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불안과 근심은 소유에서 시작되는 것이므로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봉사와 헌신을 실천하는 것은 빠를수록 좋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십일조 정신은 매우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조건 일정 부분을 떼어낼 수 있는 용기는 사실 자신을 살리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된다. 더 나아가서 애착관계에 있는 인간관계까지도 적당히 거리를 둘 수 있다면 불안과 염려, 그리고 근심걱정은 물론이고, 삼복더위도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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