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은 역사적으로 명망 높은 목민관들이 애민정신을 실천한 정치 활동 무대였다.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이 그랬고, 조선시대의 점필재 김종직, 연암 박지원이 그랬다. 함양에서 태수나 군수, 현감을 지내면서 남다른 정치력을 발휘해 지역 주민들의 삶을 편안케 이끈 주인공들이다. 공통적으로 애민사상을 바탕으로 창의적이고 탁월한 식견을 발휘해 지역 주민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삶의 질을 높여준 지도자였다. 지방정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결과물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어 뜻하는 바 크다. 신라 진성여왕 당시 함양태수로 부임한 고운 최치원은 위천강의 만성적인 홍수예방을 위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벌였다. 강둑을 쌓고 인공 숲 대관림을 만들었다. 함양의 가장 소중한 자산 중 하나인 상림이 그 무렵 탄생한 것이다. 1000년 앞을 내다본 치수대책이 아닐 수 없다. 지역민을 사랑하는 고운의 남다른 자치 행정력의 결실이라 할 만하다. 점필재 김종직은 어떤가. 지조 높은 선비답게 끊임없는 탐구정신으로 관영차밭을 만들어 지역주민의 차(茶)공납 폐해를 없앴다. 삼국사기 같은 옛 문헌을 샅샅이 살펴 지리산 자락인 함양 엄천사 부근 대밭에서 차 생산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근처 사유지를 매입해서 관영차밭을 조성한 것이다. 점필재는 후학양성에도 힘을 쏟아 일두 정여창 같은 걸출한 인재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함양성의 주요 공공건물 보수 공법도 획기적으로 개선시켜 지역 주민의 조세 및 공역 부담을 덜어주기도 했다. 지리산이라는 보석을 가진 함양 군수답게 점필재는 문인들과 5일 간의 지리산 답사에 나서 ‘유두류록(遊頭流錄)’이라는 명문을 남겼다. 재임기간 5년 동안 함양의 가용한 자산을 백분 활용하거나 창의적 발상으로 주민들의 복리증진과 교육문화부문에도 큰 족적을 남긴 것이다. 1792년(정조 16) 12월부터 3년 남짓 안의현감을 지낸 연암 박지원은 민생문제 해결에 전력투구해 주민들의 삶의 질 개선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둑 공사에 장정들을 징발할 땐 관아에서 식량을 대고, 고을별로 장정을 나누게 해서 대엿새 걸리던 일을 하루 만에 끝내게 하기도 했다. 백성들 간 분쟁해소와 공직자의 비리도 근절시켰다. 중국 방문을 통해 체득한 선진 농업기술을 현장에 접목시켰고, 물레방아 등 다양한 농기구를 만들어 보급하는 등 실사구시를 실천한 지도자였다. 연암은 안의현감에 부임하면서 전임자의 정책을 모두 부정하기보다 장단점을 잘 분석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도록 하는 등 오늘날 공직자에게 좋은 선례를 남겼다. 함양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인물들의 공적을 길게 언급한 것은 다름 아니다. 지난 1일 취임한 민선 8기 제43대 진병영 함양군수의 성공을 위해 ‘군주의 거울’로 삼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역사적으로 선배 함양군수에 해당하는 세 선각자의 깊은 통찰력을 거울삼아 군정을 펼친다면 성공한 군수로 명성을 남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진 군수는 ‘힘찬 도약! 함께 여는 함양’ 건설을 기치로 내걸고 첫발을 내디뎠다. 인기에 영합하는 선심성 정책이나 보여 주기 위한 전시행정, 내 편만 챙기는 불공정 행정을 철저히 경계하면서 서둘지도 않겠지만 어렵다고 절대 포기하지 않고 약속한 것을 차근차근 추진하겠다고 했다. 첫 회의에서는 인사 청탁 금지령을 내리는 등 공직기장 확립 의지도 보이면서 함양 발전에 자신의 전부를 걸겠다는 결기를 보였다. 지역 주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만큼 제대로 된 군수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고 싶다. 함양군의 새로운 지도자로 취임한 진 군수가 우리 고장 선각자의 지혜와 행적을 사표 삼아 탐구하고 연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 군정을 이끌어 나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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