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0일은 ‘세계 벌의 날’(World Bee Day)이었다. 2006년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발생한 꿀벌 집단 실종사건(?) 이후, 안타깝게도 금년 1월 해남에서도 꿀벌 집단 폐사가 보고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꿀벌 집단 폐사 현상은 제주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꿀벌의 집단 폐사현상은 양봉농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124개 주요 농산물 중에 여든일곱 가지 농산물이 꿀벌이나 새에 의한 수분으로 열매를 맺는다고 하니 꿀벌은 꿀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식량생산의 선봉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꿀벌의 집단 폐사 문제는 식량 생산 감소로 이어질 것이고, 이는 인류가 생존하는 데에 큰 위협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 나오고 있다. 농촌진흥청에서는 지난해 여름 고온 건조한 기온 탓에 응애나 바이러스, 또는 말벌에 의한 피해이거나 단순한 월동 피해일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꿀벌의 집단폐사 현상은 네오니코티노이드계 살충제 사용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고 있다. 담배 성분에 들어 있는 니코틴을 이용해서 만든 네오니코티노이드 살충제는 1985년 다국적 제약회사인 바이엘사(社)가개발한 아미다클로프리드가 그 시초였다. 네오니코티노이드계 살충제는 10억분의 1정도로 희석해서 뿌려도 꿀벌에게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이 계열의 살충제 57개 제품을 판매 금지시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여섯 종류의 네오니코티노이드계 살충제가 판매되고 있다. 지난 해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의 국내 판매량은 1,426억 원으로 전체 살충제 판매량의 22.7%를 차지한다니, 꿀벌의 집단 폐사와의 연관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흔히 꽃매미나 갈색날개매미충과 같은 외래종 해충이 발생하면 공공기관에서는 차량을 동원해서 살충제를 뿌리게 되는데, 정작 그 피해는 꿀벌들에게 고스라니 돌아가고 있다. 어느 정도는 해충과도 공존하며 살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한 대목이다. 일부 환경운동가들은 살충제를 사용하는 대신에 돼지감자를 삶아서 친환경 살충제로 이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다. 꿀벌의 개체 수 급감이 연쇄적으로 꿀벌의 멸종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벌통 안에서는 꿀벌들의 날갯짓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런 꿀벌들의 행동은 꿀벌 통 안의 온도를 36℃ 정도로 유지시켜서 벌꿀의 점도를 일정 수준으로 낮추고 스스로의 생체 온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개체 수 저하로 월동이 어렵게 되면서 또 다시 꿀벌의 폐사로 이어진다. 이런 현상은 비단 꿀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편리주의가 가져오는 폐해의 단면일 뿐이다. 아직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풍족해 보일지라도 적극적인 보존이 없다면 언젠가는 모든 자원이 고갈되고 말 것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내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한 사람이 오는 것은 그의 인생 전체가 오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한 사람이 떠나는 것은 온 우주가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부부간에는 더 그렇다. 부부간에는 1 더하기 1이 2도 되고, 3이나 4, 그 이상도 될 수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떠나고 나면 하나가 남는 것이 아니다. 남은 한 사람에게는 무의미와 공허만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2 빼기 1은 1이 아니라, 0이다. 지난 12월에 아내를 먼저 보내고 한동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나머지 1이 되어서 살면 그만이지 싶었다. 그런데 남은 1이 1이 아니라, 0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이 깊어졌다. 수백 억, 수천 억 마리의 꿀벌도 하루아침에 사라지기도 하는데, 그까짓 하나가 사라진 것이 무슨 대수냐고 하겠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이전에 가정적 동물이다. 가끔씩 TV에서 보는 우랑우탄 가족만 봐도 부러운 것이 혼자 된 사람의 심정이다. 그러다가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게 되는 것은 며느리의 전화였다. 거의 연년생에 가까운 두 아들을 키우고 있는 며느리의 푸념을 들으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세 살짜리 큰 손주의 투정이 늘었다는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정겹게 들리던지. 큰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한차례 전쟁을 치룬 얘기며, 큰애가 아빠만 좋아해서 섭섭하다는 며느리의 말이 귀엽기까지 했다. 그래도 네 식구가 어렵사리 살면서 하나의 가정을 꾸리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기만 했다. 막내가 한 번씩 열이 나서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 어쩔 줄 몰라서 쩔쩔매는 며느리가 애달프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 아들에게 저렇게 예쁜 짝이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평생 살아가는 동안 아프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고 살 수는 없겠지만, 미운 세 살 사내아이와 이제 갓 생후 70일이 지난 막내까지 얼마나 힘이 들까? 가끔씩은 참지 말고 신랑한테 마음껏 투정이라도 부려보라고 귀띔해 주었다. ‘2-1=0’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땐 너무 늦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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