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특히 한반도 역사에 있어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비극의 달이라는 인상 또한 짙다. 전쟁 당시 함양지역에서는 빨치산·인민군 그리고 군사·경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고 그 상흔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호국보훈의 달은 국가를 위한 희생정신은 물론 국가에 의해 희생된 이들과 그들을 보내고 남겨진 이들의 절망도 함께 기억해야 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주간함양은 호국 보훈의달과 한국전쟁 72주년을 맞아 한국전쟁 시기 함양지역과 관련된 기록들을 3편에 걸쳐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이 고장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의 이야기를 통해 나라 사랑 정신을 새롭게 인식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해당 내용들은 모두 함양문화원이 기획, 제작하고 경남문화원연합회를 통해 2017년 발행된 자료 ‘함양 지리산의 빨치산 이야기’를 참고했음을 밝힌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1. 끝 모를 이념 전쟁 속 ‘함양’2. 기억해야 할 숨은 인물들3. 기록이 말하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   끝 모를 이념 전쟁 속 ‘함양’   함양은 한국전쟁 발발 시기인 1950년 6월25일 이전부터 사실상 전쟁 상태였다.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 반란군이 덕유산과 지리산에 입산해 군사·경찰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 이후 함양군에 처음 인민군이 들어온 것은 1950년 7월26일~27일로 추정된다. 인민군 제4사단이 금산, 안의, 거창, 진주를 거쳐 마산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27일 안의 점령을 시작으로 이틀뒤인 29일 함양군 전역을 점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민군의 함양 점령기간은 약 2개월이었다. 이 기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1981년 간행된 향토지 『함양군지』는 “인민군 치하에서 벌어진 일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빨치산의 하산, 군과 읍·면 그리고 리 단위까지 인민위원회 결성, 사상교육,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따른 토지개혁, 현물세 징수, 의용군 할당 모집, 인민재판과 우익인사 학살 등이었다. 하지만 당시를 경험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초기에 들어온 인민군은 주민에게 전혀 희생을 주지 않았다’고 증언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인민군 점령기간 인민재판에 의한 우익인사나 유지, 경찰 및 공무원에 대한 학살은 인민군 정규군이 아니라 대부분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이거나 지방좌익에 의해 저질러졌다. 그러나 ‘전국전쟁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최종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9월 중·하순 퇴각하던 때에는 인민군 또한 수감 중이던 공무원과 경찰, 우익인사 등을 함양에서 집단학살했다고 밝히고 있다. 1950년 9월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되면서 서울이 수복된 9월28일 함양을 점령했던 인민군은 철수했다. 미2사단은 합천에서 거창과 함양 안의면을 거쳐 진주로 인민군을 추격했고 퇴각하던 인민군 6사단과 7사단 병력 중 상당수가 지리산과 덕유산 등지에 입산해 기존의 빨치산과 합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리산지구 경우 제6사단과 제7사단 병력 2500여명과 지방공산 잔당 500여명이 합세해 지리산·백운산에 들어갔으며 덕유산·가야산·속리산·대둔산·서대산 일대에도 3개 집단이 유격전을 전개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군경의 빨치산 토벌과정인민군 퇴각 시기인 1950년 9월26일 내무부장관이 치안회복에 관한 포고령을 선포했지만 성과가 없었고 이에 육군본부는 10월초 제11사단을 호남지역에 투입해 토벌 임무를 맡도록 했는데 이 사단은 곧 후방지역 작전을 담당하는 3군단에 배속돼 호남지역과 함양·산청 등 서북부 경남지역의 빨치산 토벌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제11사단은 이 토벌 작전 과정에서 함양을 비롯한 서북부 지역에 씻을 수 없는 비극을 남긴다. 이들은 1951년 3월까지 약 6개월동안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1951년 2월7일~11일까지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휴천면, 유림면 일원에서 705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거창군 신원면에서도 719명을 학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제6차 보고서에 따르면 전쟁 이전인 1949년 5월~1950년 3월까지의 기간에도 토벌작전을 하던 군경(국군 제3연대, 함양경찰서, 특공대 등)이 함양읍, 안의면, 지곡면, 수동면, 서하면, 백전면, 휴천면 등 산간마을 주민들을 빨치산과 내통·협조했다는 혐의로 군부대, 함양경찰서 등으로 연행해 고문과 취조를 했고 이후 함양읍 이은리 당그래산, 안의면 공동묘지 등의 장소에서 살해한 바 있다. 진실규명 대상자 중 함양 민간인 희생사건 희생자로 확인된 사람은 86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전쟁 당시 함양군민들은 불법 처형 못지않게 의용경찰로 참여하면서 많은 희생을 입었다. 이들은 향토방위대 또는 특공대로 불렸으나 군이나 경찰과 달리 명단은 물론 각종 통계에서도 누락돼 정확한 인원은 파악할 수 없는 상태다. 1951년 내무부차관의 국회보고 기록에 따르면 경남에서는 향토방위대 및 대한청년단 2만1105명이 보수도 없이 경찰 앞에 서서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함양군 마천면의 특공대만 해도 120~130명으로 추정되면서 다른 면에서도 100명 이상의 의용경찰이 빨치산 토벌작전에 동원됐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의용경찰과 달리 전투에 참여했던 대한청년단은 우익단체이자 준 경찰조직이었다. 이들은 주로 주민들 중 부역자를 색출하는 하는 등의 경찰의 사찰업무 보조 역할을 했다는 증언이 많다. 『마천향토지』에서는 당시를 경험했던 주민들이 한결같이 “경찰과 한청(대한청년단)이 빨치산을 만들었다”는 증언이 기록되어있는 만큼 주민들에게 경찰 이상으로 공포의 존재였다. 11사단은 1951년 3월29일 산청·함양·거창 민간인학살 사건이 국회에서 제기되면서 대구로 이동했다. 당해연도 5월부터 11월까지는 서남지구전투사령부 예하 예비 3개 연대와 경찰 8개 부대가 토벌작전을 맡았는데 빨치산의 공세가 심해지자 1951년 11월 이를 토벌할 목적으로 다시 2개 사단(수도사단, 8사단)으로 구성된 ‘백야전 전투사령부’를 지리산지구에 투입한다. 전체 병력이 3만여명이나 되는 큰 규모의 백야전사를 필두로 12월부터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진행됐고 1952년 3월14일까지 3개월 보름간에 걸친 토벌 끝에 빨치산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됐다. 이후 1952년 7월10일 전방의 전황이 안정되면서 지리산, 화문산, 장안산, 덕유산 토벌작전 지원이 이루어졌고 경찰과 분리된 남부지구 경비사령부와 서남지구 전투경찰대가 1954년까지 빨치산 토벌 작전을 계속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1953년 9월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조선인민유격대 이현상이 사살되었고 11월28일에는 산청군 지리산 상봉골에서 이영희를 비롯한 대원 62명이 함께 궤멸됐다. 이것이 빨치산 부대와의 마지막 교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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