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치 눈 길 위를 지나듯이 누구나 자기 발자국을 남긴다. 사회학의 여러 이론가운데 낙인이론(烙印理論)이 있다. 낙인이론은 어떤 사람을 사회 제도나 규범에 따라 낙인찍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올바른 행동을 하기 보다는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론이다. 1960년대에 시카고 학파에 속한 하워드 S. 베커(Howard S. Becker)에 의해 제창된 일탈행동에 관한 이론이다. 3년 전 코로나19 초기에 나타난 우리 사회의 현상이었다. 그리고 지난 대선 이후 우리 사회는 “내 편과 네 편으로” 갈라지며 “낙인을 찍을 것인가? 상생(相生)할 것인가?” 갈림길에 서 있는 듯하다. 옛 중국의 맹자(孟子)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하였다. 이루편에 나오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 즉, “처지가 바뀌면 모두 그리했을 것이다”라는 표현에서 유래된 고사성어다.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인 사회에 내 것을 내려놓고 상대방과 조율하는 일이 필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는 각자가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견해를 달리할 수 있다. 민주사회의 가장 중요한 표현의 자유다. 그러나 사랑이 결여된 지식, 사랑이 결여된 표현의 자유는 칼날이 되어 다른 사람을 궁지로 몰아가고, 심지어 생명을 위협하게 된다. 결국 공동체는 허물어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의 “니벨룽겐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는 우리에게 중요한 초점을 일깨운다. “니벨룽겐의 반지”는 북유럽 신화를 소재로 만들어진 4부작 음악극이다. 1,320km에 달하는 라인 강 바닥에 있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신들의 황금을 훔쳐다가 “절대반지”를 만드는 못생긴 난쟁이가 등장한다. 난쟁이는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을 소유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주는 반지를 만들고자 한다. 그런데 그 반지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한 가지 조건을 채워야했다. “사람을 사랑하거나,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일을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황금을 지키고 있던 라인 강의 요정들은 “이 세상에서 사랑을 포기하고 황금을 얻으려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며 방심한다. 결국 난쟁이에게 황금을 도둑맞게 된다. 이 이야기는 사랑과 황금을 모두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과 황금을 모두 내 손아귀에 잡아 쥐고 싶어한다. 욕심이다. 4월, 상림 숲은 따뜻한 봄기운이 만연하여 연초록빛이 나뭇가지마다 새싹을 틔우고 있다. 우리는 계절의 신비(miracle) 앞에 다시 선다. 남극의 추위를 견디는 황제펭귄에게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야할 때다. 일명, 펭귄의 “허들링(hurdling)”이다. 일반적으로 추운 겨울이 다가오며 기온이 내려갈수록 따뜻한 곳을 찾는 것이 생태계의 원칙이지만 황제펭귄은 정반대로 천적이 없는 가장 추운 곳을 찾는다. 황제펭귄은 극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남극의 한겨울은 영하 60-70도가 보통이다. 뿐만아니라 해가 뜨지 않는 암야기가 이어지고 극지의 강풍까지 불어온다. 그러나 천적이 없는 극점에 도달한 황제펭귄은 서로 몸을 맞대고 촘촘히 포개며 원을 만든다. 먼저 바깥쪽 펭귄이 안쪽 펭귄을 보호한다. 얼마 후 바깥쪽 펭귄들의 체온이 떨어지면 안쪽 펭귄들과 위치를 바꿔 서로 품는다. 그렇게 서로를 품어 주면서 함께 강풍과 어두운 겨울을 보낸다. 배려와 협력으로 자리다툼 없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의지함으로서 상대방의 체온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사랑의 흔적이요, 신뢰의 흔적이다. 이웃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내가 사는 길이기도 하다.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정부와 지방선거가 미움과 다툼, 시기와 불편한 상극(相剋)의 흔적을 대신하여 사랑과 배려, 포용과 상생(相生)의 흔적을 가지길 바란다. 따스한 햇살이 머무는 고장, 우리 함양에서 너를 살리는 길이 곧 내가 사는 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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