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읽겠다고 매번 덤비지만 매번 실패한다. 책을 펴자마자 5페이지 분량에 실린 잔혹한 사진들을 견디지 못해서, 전쟁의 근본 원인에 대한 버지니아 울프의 『3기니』에 대한 사유가 필요해서, 전쟁의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겹겹 쌓여서, 곳곳에 배치한 전쟁이 남긴 사진의 이미지를 넘어 실제의 현실은 비교할 수 없다는 그 참담함을 마주하기 버거워서 리딩이 중단되곤 했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도 끝까지 읽지 못한 책이다. 목차를 무심히 넘기고 나면 간지에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는 문장이 있고 문장 아래 괄호로 묶어 ‘일기장에서’라고 쓴 글이 보인다. 이 문장은 문장으로만 읽으면 별다른 고통없이 지나간다. 그 다음 장에는 “값없이 죽임당한 수백만의 사람들 어둠속에서 길을 다지네......” 라는 인용문이 오른쪽 쓰기로 두줄 지나가는데 짧은 순간 잠시 숙연해지고, 잠시 공포감을 느낀다. 본문의 첫문장은 “나는 전쟁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로 시작된다. 뒷표지에는 “이 책은 전쟁에 직접 참전하고 살아남은 여성 200여명의 목소리”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결국 읽을 수 밖에 없는 이 책들은 전쟁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고통을 안겼는지 각자의 시각과 상황으로 이야기한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전쟁을 뉴스로 접하거나 사진이나 영상, 영화, 회화 등을 통한 이미지로 무감각하게 인지한다.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다룬 피카소의 <게르니카> 역시 비극의 상징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그친다. 세계사를 다룬 책들도 마찬가지다. 텍스트가 전하는 1,2차 ‘세계대전’도 역사적으로 일어난 연대기적 사실로 인지하며 읽고 잊어버린다. 수전 손택은 이런 현상을 세세히 분석하고 뉴스가 전쟁의 고통과 비극을 이용한다는 것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 광범위한 매체의 이미지로 소모되어 교훈으로도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꼬집는다.
정작 전쟁을 기획하고 지시한 사람들은 참전하지도 않는 전쟁에, 원하지 않고 동의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뉴스를 보며 러시아 시민들의 반전시위를 겹쳐본다. 누구보다 ‘군인들이 전쟁을 반대한다’는 어떤 기사에 공감하면서 “우리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알지 못한다”고 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라는 점을 떠올렸다. 그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자신이 쓴 책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그 책은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지를 생각할지도 모른다. 수전 손택이 살아있다면 그렇게 역설적力說的으로 말한 『타인의 고통』이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를 생각해 볼 것인가. 누가 읽었으며 누가 안읽었는지 모르지만 그 역설이 관념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씁쓸해진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 침공은 ‘원시적이고 중세적’이라는 이스탄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의 언급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제국주의, 혹은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어떻게 침공했으며 어떻게 약탈했는지는 우리의 역사에도 있는 일이다. 폴란드가 왜 강경해지려고 하는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지 모른다는 예측이 왜 빈번한지, 주변국가들이 왜 촉각을 곤두세우는 지 모두 아는 일이다.
여전히 우크라이나 침공의 여파들이 조각조각 지면에 출몰하고, 읽고싶지 않은 학살현장 보도도 있고, 러시아 병사들의 사기저하의 기사도 보인다. 전쟁이 종식된다 할지라도 이미 잔혹한 희생과 고통은 잊을 수 없을 것이고 러시아의 전범, 그 불명예도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 전쟁에 대한 책을 또 쓸 것이다.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