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어로 시간을 크로노스(Κρόνος)라 한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크로노스는 갓 낳은 자식들을 잡아먹는 무서운 존재로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시간의 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넘어설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 속에서 인간은 불안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희망함(hopefulness)”으로써 현재라는 시간이 소멸하는 것에 대한 불안과 염려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희망은 인간이 살아가는 존재 방식이다. 코로나19(COVID-19)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우리에게 불쑥 찾아온 코로나19 역병(疫病)은 “공존(共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다. 정말 긴 터널 같은 시간이 지나고 있다. 2021년 11월 14일 남아프리가공화국에서 처음 발견되어, WHO에 의해 처음 공표된 변이 “오미크론(omicron)”은 새로운 변이체로 불과 2개월 만에 전 세계 우세종으로 자리 잡았다. 오미크론 확산으로 세계적, 국가적으로 코로나19 대응은 “동선추적 격리치료”에서 “자가 격리치료”로 전환되었다. 속단하긴 이르지만 유럽의 몇몇 나라들은 독감처럼 우리 일상 속에 함께 살아가는 “위드(With)코로나”를 준비하며 방역해제를 서둘고 있다. 우리 사회도 전환해법을 모색하며 대응책들을 고심하고 있다. 백신의 면역효과를 높이기 위해 부스터 샷이 강조되고 일각의 시선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에 백신무용론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특별히 다음세대인 우리 자녀들은 백신미접종 세대로서 곧 있을 3월 개학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을 안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근래에는 7대 방역지침을 비롯한 신속 항원진단키트를 활용하여 보다 신속한 검사를 통해 확산통로를 차단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일일 확진자 10만명 폭증에 의료체계와 방역관리에도 비상이다. 어쩌면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과 관공서, 또한 기저질환자, 소상공인, 서민들의 삶의 자리는 녹록함을 지나 절망으로 치닫는 듯하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어떤 기대를 가지고 바라는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우리에게 희망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현실의 모든 것이 완벽하다면 우리는 희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가만히 보면 우리 인생은 “죽음(死亡)”이라는 절망 앞에 서 있다. 생명의 결핍이다. 잘살든 못살든, 부요하든 가난하든, 배웠든 못 배웠든 이유가 불문(不問)하다. 예외가 없다. 우리는 코로나19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죽음 앞에 서 있는 존재였다. 수천미터 상공을 비행하던 비행기가 어떤 결함이 발생하여 추락할 때 그곳에 “희망이 있는가?” 심해(深海) 깊은 바다 속을 잠수하던 잠수함이 엔진고장으로 침몰할 때 그곳에 “희망이 있는가?” 추락하는 비행기, 침몰하는 잠수함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다. 외부로부터 어떤 도움이 필요하고 구조를 기다릴 뿐이다. 단지 희망하며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희망”은 불완전한 위기상황 속에서 완전을 기다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축적된 과학과 지식을 활용하여 끊임없이 불로장생(不老長生), 불사(不死)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희망이 없는 인생은 두려움과 절망의 인생이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하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황이나 조건들을 붙들고 있었다면 그 문제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는 불신이 팽배하고 “물질만능”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대다.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끊임없이 더 많은 물질을 축적하기를 원하고, 이웃이 없는 시대다. 코로나19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나”뿐만 아니라 “우리”라는 이웃을 돌아보게 하였다. 우리는 지금 사람과 이웃과 공동체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함양의 민·관·종(民·官·宗)이 한마음이 되어 위드(with)코로나19의 새로운 방역의 모범을 만들어 내고, 청정 함양을 만들어가는 따뜻한 계절 봄을 기대해 본다. 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다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Never give up! 포기하지 말라! 이곳에 희망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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