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에 벌어진 EPR과 보어의 공방은 이론적으로는 매우 절박한 문제였지만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얽힌 두 입자들을 아무 상호작용 없이 먼 거리만큼 이동할 수 있는 기술도 없었을 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측정해야 승부를 가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불분명했다. EPR 역설에 대한 실험에 앞서 무엇을 어떻게 측정해야만 할지에 대한 이론적 보완도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이는 30년을 기다려야 했다. 한편 같은 해에 양자역학의 핵심 방정식을 이끌어냈던 슈뢰딩거 역시 코펜하겐 해석에 도전하는 또 하나의 사고실험을 제안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이다. 슈뢰딩거가 볼 때 고양이와 같은 거대한 존재는 양자역학의 법칙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물론 대다수 과학자들에게 올바른 생각이었다. 슈뢰딩거는 매우 기발한 상황을 제공한다. 먼저 큰 상자 안에 방사능 원소와 방사능물질 감지기, 그리고 이와 연계해 작동하는 망치, 독가스가 든 병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사의 귀로에 선 고양이 한 마리를 넣는다. 그런데 방사능 원소는 미시적 입자이기 때문에 양자역학의 법칙을 따른다. 이때 방사능 원소가 1시간 안에 붕괴할 확률이 1/2, 붕괴하지 않을 확률이 1/2이라고 하자. 만일 붕괴한다면 방출된 방사능 물질은 감지기에 관측되면서 망치가 작동하여 독이 든 병을 깨뜨리게 되고 이로써 고양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반면 붕괴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결국 고양이는 살아있게 된다. 코펜하겐 해석을 적용시키면 상자의 뚜껑을 닫고 아무도 관찰하지 않는다면 고양이의 상태 역시 살아있을 확률 1/2, 죽어있을 확률 1/2이 중첩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거시적 존재인 고양이가 삶과 죽음의 중첩 상태에 있다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 모순적인 상황은 결국 방사능 원소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코펜하겐 학파의 확률 해석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매우 그럴듯한 사고실험으로 양자역학이 갖는 여러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고양이와 같은 거시적인 존재의 경우에도 양자역학적인 중첩현상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구분하여 전자는 양자역학이, 후자는 고전역학이 지배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지만 만일 거시적 존재의 양자현상이 가능하다면 삶과 죽음이 중첩된 고양이도 가능할 수 있다. 현재의 상황에서 고양이와 같은 터무니없이 큰 존재는 아니지만 전자와 같은 소립자와는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한 존재 (예를 들어 바이러스)는 알맞은 조건 하에서는 거시적 양자현상이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미시세계에서만 양자역학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럼 알맞은 조건이란 무엇일까? 코펜하겐 해석은 측정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즉 어떤 입자를 관측하기 이전에는 중첩상태에 있지만 측정을 통해 확인하면 중첩상태가 사라지고 고전역학적 존재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대상이 거시적 존재라 하더라도 그 대상을 측정하지 않는다면 양자중첩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그럼 측정은 무엇일까?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인가, 아니면 측정 장치가 그 대상을 감지하는 것인가? 측정의 문제는 아직도 명확히 이해할 수 없는 난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측정의 주체는 인간도 기계도 아닌 자연이라 보는 해석이 있다. 그 대상이 자연에 있는 작은 입자 하나라도 부딪히게 된다면 그것은 자연에 의해 측정당하는 것이다. 즉 자연은 그 대상을 관측한 것이다. 현실적 조건에서 대상이 커질수록 이 상황을 피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마치 크기에 따라 양자 중첩상태가 더 쉽게 사라지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아무튼 슈뢰딩거 고양이는 코펜하겐 해석이 갖는 여러 문제들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실제로 EPR역설과 더불어 ‘슈뢰딩거 고양이’는 코펜하겐 해석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코펜하겐 해석의 불확실한 부분들을 고민하게 함으로써 좀 더 완성도 있는 해석으로 이끌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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