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제목부터 반어적이고 역설적逆說的이다. 표면적으로는 얼마나 찬란한 제목인가. 그러나 인간을 제조하는 공장이 등장하면서 멋진 신세계는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가 된다. 인간이 실험실에서 인공부화되는 사회를 <멋진 신세계>라 표현한 것은 왜곡된 과학기술에 대한 비아냥, 혹은 비틀린 과학기술을 찬양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이거나 질문이다.
한편 SF영화 <서복>은 복제인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시사할만 하지만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애매하다. 기계기술문명에 대한 저항인지 복제인간 서복에 대한 휴매니즘인지 갈피를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기술로 탄생한, 인간이 아닌 인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멋진 신세계와 굳이 다를 바는 없어보인다.
<멋진 신세계>나 <서복>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조인간 AI는 곳곳에서 당당하게 등장한다. 콘텐츠에도, 정치권에도 등장한 AI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줄 것인지 모르겠지만 콘텐츠는 경제적 성과를, 정치권은 정치적 성과를 기대할 것이다. 상업권에서는 인건비 절감과 편의성을 도모하지만 AI는 인간의 영역에서 인간을 밀어낸다.
닉 폴슨과 제임스 스콧의 <수학의 쓸모>는 ‘세상을 바꾸는 AI 뒤에는 수학이 있다’고 하면서 AI의 이점을 여럿 늘어놓았다. 투자자는 AI를 통해 재정상의 위험을 관리하고, 석유회사는 심해 채굴 장치의 안전성을 높이며, 정보당국은 AI를 이용해 테러리스트를 색출하고 과학자는 천문학·물리학·신경과학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역할을 더 열거하고, 넷플릭스는 어떻게 AI를 활용하는지를 세세히 설명하며 구글과 페이스북과 알리바바가 AI에 한껏 고무되어 있는 현상도 전한다.
인류에 공헌하는 분야나 기여는 AI의 우호적인 측면이지만 부정적인 측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멋진 신세계’가 연출될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한다. 와중에 정치권에 등장한 AI를 두고 과학자들이 일갈했다. 정재승 바이오뇌공학과 교수는 “처벌과 사용범위 등의 합의가 안된 상태에서 섣불리 사용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전창배 인공지능윤리협회 이사장도 “선거운동기간 중 악의적 모함 시 현행법으로 처벌할 수 있어야 하며, 가상의 영상을 활용하더라도 인공지능이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은 AI의 활용에 법적 장치를 요구할 만큼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AI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은 그래서 단순해 보인다.
인류의 문명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 모르겠지만 올더스 헉슬리나 서복의 시나리오 작가들은 과도한 과학기술문명에 우려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이면에 센세이셔널sensational한 썸네일, 혹은 충격적인 이미지로 상업적 특수를 노리는 의도가 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보다 인간에 대한 어떤 사명이 앞섰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멋진 신세계>는 과학기술이 인간의 몰락을 자초할 것이라는 구도를 가지고 있으므로 반유토피아적 소설이다. 과연 이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얼마나 될 것이며 서복을 관람한 38만여명의 관객들은 문제의식을 가지긴 했을까. AI를 활용하는 각종 산업 전반에서의 기여와는 다른, 인간사회를 저해하는 요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았을까.
개인이 속한 분야에 따라 과학기술에 대한 입장이 다르고 그 입장조차 없는 사람들이 더 많지만 무엇이 되었든 인간사회를 저해하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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