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음력7월28일 정오께 함양군 수동면 도북마을 주민 32명이 공비와 내통한 통비분자의 누명을 쓰고 끌려가 다음날 군 트럭에 실려 당그래산 골짜기에서 학살당했다.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양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날의 기억은 뼈아픈 역사로 남게 됐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었고,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수동면 도북마을 사건이 접수되고 2년 후인 2007년 함양군 전체 총 181명이 다소나마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다. 2021년 12월17일 함양군 한국전쟁 전후 양민희생자 위령탑 건립 및 추모공원 준공식이 열려 희생자들이 영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들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져 아픈 역사를 기록에 남길 수 있게 됐다.수동면 도북양민학살 사건이 일어나던 때 12살이던 유족대표 차용현씨는 올해 85세가 되었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양민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차용현 회장의 증언을 토대로 역사의 진실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기억하고자 기록하여 남기려 한다. 편집자말
세세연년 무릎 펴고 고이 잠드소서
사상전에 시달린 도북사람들1945년 8·15 해방된 전후 남북은 이념으로 갈라져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수동면 도북마을 사람들은 그저 살아가기에 급급한 고단한 삶을 살면서 낮과 밤을 바꿔가며 사상전에 시달려야 했다.“당시 남한에도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사람들이 있었는데 도북마을에도 몇 명 있었지. 1949년 내가 12살, 초등학교 5학년이던 때, 사람들이 뭉쳐 다니면서 공산주의 할래 안할래 협박을 하고 다녔어. 공산주의는 다 같이 잘살게 하는 거라고 하니 가난한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한다고 하고 부자는 안한다고 했어. 공산주의 안한다고 하면 살림을 부수고 쇠몽둥이로 때리니 못 견디고 집도 버리고 짐을 싸서 도망갔던 이들이 몇몇 있었어”도북마을에서는 주민 3명이 빨치산 활동을 했다. 수동지서에서 올라와 이들 집을 불태우자 볏짚으로 지은 집은 순식간에 불타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9채의 집이 한꺼번에 소실됐다. 마을 사람들은 불이 번지지 않도록 도랑까지 가서 물을 길어와 뿌리고 짚으로 만든 덕석을 지붕에 덮어 화를 면했다. 불티는 온 사방으로 흩어지고 자욱한 연기는 마을을 휩쓸며 한 판 난리를 쳤다. 빨치산들은 집을 잃고 산으로 피신했다. 그들은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총칼로 위협하며 식량을 약탈해 갔다. 다음날 경찰에 신고하면 주민들을 보호하기는커녕 빨치산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고 경찰은 사람들을 구타했다.낮에는 경찰에, 밤에는 빨치산에 위협을 당했던 마을 주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밤마다 보초를 섰다. 차용현씨는 “12살 때 아버지가 보초 서러 가면 나도 놀러 갈 겸 따라나섰지. 산에서 내려오는 길목에 보초막이 있었다”고 설명했다.악몽의 전조1949년 음력 7월28일 정오께 도북마을 주민 32명이 군 트럭에 끌려가 다음날 당그래산 골짜기에서 총살당하고 매장됐던 그날이 있기 이틀전 26일, 보초를 서던 마을 주민들은 보따리를 싸서 산으로 도주하려던 이발사 정주상씨를 잡았다. 경찰에 넘기면 빨치산에게 당할 것이고 빨치산에 넘기면 경찰에게 당할 것이 분명하여 진퇴양난에 빠진 마을 사람들은 고심한 끝에 정씨를 경찰에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이 선택이 마을 사람들에게 가혹한 악몽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경찰에게 조사를 받던 정주상씨는 “나 하나만 빨갱이가 아니다. 이 동네 사람 전부 빨갱이다”며 “도북 마을 사람들은 빨갱이가 내려오면 먹을 것을 주었다”고 진술했다. 정씨로부터 자백을 얻은 경찰은 그의 집을 수색하여 장부를 찾아냈다. 이 장부는 이발사이던 정씨가 외상으로 이발을 해 주고 추수 때 곡식을 갚기로 한 마을 사람들 이름이 적힌 외상장부였다. 그러나 경찰은 장부에 적인 사람들을 공비와 내통한 통비분자로 간주하고 주민들을 모두 모이게 했다.통비분자로 내몰리다차용현씨의 아버지는 그때 학교 밑에 있는 물레방앗간에서 보리를 찧고 있었다. 경찰이 오라는데 가지 않으면 큰일이 날것이 뻔해 미처 방아를 찧지도 못하고 짐을 세워둔 채 달려갔다. 징소리를 듣고 모여든 30~40여명의 장정을 경찰 3명이 감당하기 어려워 먼저 나온 사람만 새끼줄에 엮어서 경찰서로 잡아갔다. 개중에는 눈치를 채고 도망가거나 피한 사람도 있었다. 신작로도 아닌 소리길(오솔길)을 지나 도북에서 수동까지 순순히 따라갔다. 죽음을 예감했다면 쉽게 도망칠 수도 있었던 길이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는 마을사람 35명은 수동지서까지 오게 됐다. 수동지서에서 35명을 취조하는 것은 감당이 되지 않아 이들을 군부대에 넘겼다. 함양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었던 3연대 3대대 11중대는 여순사건을 토벌하고 지리산으로 온 부대로 도북마을 사람들을 고문하고 취조했다. 당시 끌려온 마을사람 35명 중 희생되기 직전 빠져나온 3명의 증언에 따르면 이발사 정주상씨를 회전의자에 앉혀 놓고 한 명씩 앞에 끌어다 놓고 “이 사람이 빨갱이 짓을 했냐, 양식을 줬냐”고 물으면 정씨가 줬다 안줬다로 답하였다. 정씨의 말에 반박하여 양식을 주지 않았다고 했던 마을 사람들은 몽둥이 세례를 받았다. 그것도 모자라 군인들은 마을사람들을 거꾸로 매달아 고춧가루를 풀어 코에 넣고 전기로 지지며 모진 고문을 했다. 고문에 지친 사람들은 거짓으로라도 ‘공비에게 양식을 주었다’고 진술할 수 밖에 없었다. 소를 팔아 아버지를 빼내려 했으나그 때 끌려갔던 35명 중 풀려난 사람은 차재홍, 권재근, 정순상씨 등 3명이다. 이들의 증언으로 군인들에게 취조 당했던 그날의 현장이 역사에 기록될 수 있었다. 차재홍씨는 차용현씨의 백부였으며 고문후유증으로 4~5년 후 사망했다. 권재근씨는 도북마을 이장이던 형 권재평씨가 당시 소 한 마리 값의 돈을 써 빼내 올 수 있었다. 모진 매질을 견디고 살아나온 권재근씨였으나 1년도 되지 않아 사망했다. 당시 함양군수쯤 되는 권력을 가진 정충현의 집안사람이던 정순상씨는 오랫동안 생존하여 이날을 생생히 증언했다. 아버지와 백부, 당숙이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차용현씨는 아버지와 이들을 빼내야겠다는 생각에 고모부를 찾아갔다. 소 장수에게 소를 담보로 돈을 마련하여 고모부가 아는 함양의 지인을 통해 이름도 모르는 군인에게 돈을 주며 아버지, 백부, 당숙 3명을 꺼내 줄 것을 부탁했다. 이튿날 가족이 모두 빠져나올 것이라 믿고 경찰서로 갔던 차용현씨는 차로 이동하려는 군인을 만나게 됐다. 세 사람의 소식을 묻자 군인은 “세 명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지 못해 백부 한 사람만 빼 놓았다”는 무책임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돈이 부족하여 세 사람을 모두 빼내지 못했다고 생각한 그는 함양에서 도북까지 또다시 걸어갔다. 소 장수에게 집에 남은 마지막 소를 맡기고 돈을 마련한 차용현씨는 다시 도북에서 효리를 지나 함양에 도착했지만 이미 사람들이 실려 나간 뒤였다. 마을 사람들이 함양읍 인당 당그래산으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린 차용현씨는 그 산으로 찾아가지 못하고 마을로 걸어오고 있었다. 소문은 그의 걸음보다 빨랐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마을 오솔길을 걸어오니 아이를 업은 여인들이 길에 나와 울고불고 동네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그의 뒤로 인당 당그래산에서 시커먼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경찰에 의해 철망이 덮인 차에 실려 인당 당그래산으로 끌려갔던 도북마을 사람들. 군인들은 고랑쪽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은 후 총살하고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끌려간 도북마을 사람 32명과 공산사상을 갖고 산에서 살던 여인과 아들, 이발사 정주상씨까지 35명 모두 1949년 음력7월29일 학살당했다.도북마을에서 쫓겨나마을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문이 나면 민란을 일으킬까 하여 청년단과 경찰, 빨치산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도북마을 사람들을 하교마을로 내쫓았다. 한 두 시간 내 마을에 불을 지를 테니 마을을 떠나라고 협박했다. 160호 가량 되는 도북사람들은 80호 되는 하교마을로 피난을 갔다. 짐도 못 챙기고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반란을 일으킬 정신은 없었다. 먹을 것도 제대로 못 챙긴 차용현씨 가족은 하교마을 제일 끝 집의 외양간에 짐을 내려놓고 밤을 지새웠다. 보따리 하나라도 더 챙겨 와야 했던 차용현씨는 다음날 마을로 올라가 짐을 가져오고 외양간에서 솥을 걸어 밥을 해 먹으며 살았다. 낮에는 마을로 올라가 일을 한 뒤 내려오기를 반복하여 심어 놓은 곡식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서야 그들은 도북마을로 올라갈 수 있었다.아픔의 현장, 당그래산학살을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청년이었다. 자식들은 부인의 뱃속에 있거나 태어난 지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은 핏덩이였다. 사건이 있은 후 남편을 잃은 부인들은 지서로 끌려가 나체로 몰매를 맞거나 고문을 당했다. 여인들은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마을을 등지거나 개가하여 떠난 이도 있었다. 홀로 남겨진 아이들과 유복자 몇몇은 친척 집을 떠돌았다. 밥만 먹여주고 잠자리만 해결되면 무슨 일이든 해 가며 어렵게 성장했다. 도북양민학살 사건이 있고 한 달 뒤 미망인과 장년들에 섞여 차용현씨는 아버지의 시신을 찾기 위해 인당 당그래산으로 갔다. 그들은 시체를 흙으로 대충 덮어두어 다리가 밖으로 삐져나온 현장을 목격했다. 수없이 삽질을 하여 유골을 겨우 찾았다. 하지만 유골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경찰 민방위대가 쫓아와 마을 사람들을 몽둥이로 때리고 구둣발로 찼다. 결국 단 한 구의 시신도 모셔오지 못하고 쫓겨 왔다.차용현씨는 그때부터 언젠가 시신을 찾아오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을에서는 아무도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학살당한 청년의 부인들은 떠나고 자식들은 너무 어렸다. 때를 기다리며 그는 일 년에 한 번씩 당그래산을 찾아 그곳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았다.십여년 쯤 후, 비가 많이 와 수해가 났던 그해 당그래산을 찾은 차용현씨는 산에서 쏟아진 흙무더기가 마을 사람들의 시체를 잘 덮어 2미터 높이의 묘를 이룬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덕분에 유골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 같아. 43년 만에 유골을 발굴할 당시 빨치산이었던 여인의 머리카락이며 하얀 단추까지 그대로였지”유골을 발굴하기 전까지 차용현씨는 노심초사하며 이곳을 지켰다. 귀신이 나올까 봐 무덤 뒤 골짜기에 예비군 사격장이 생긴다는 소문이 그의 귀에 들어왔다. 군청으로 달려간 차용현씨는 “억울하게 죽은 것도 원통한데 사격장이 웬말이냐”며 따져 물었다. 현장에 가서 확인해 보고 다시 얘기하자는 말에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당그래산으로 향했다. 다행히 사격장은 그 너머에 있어 안심하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43년 만의 장례식1991년 12월(음력1월15일) 차용현씨는 마을대동회를 열어 유골을 발굴하자고 결의했다. 1949년 출생자와 유복자 등이 참여하여 희생자 유골 발굴과 위령비 건립 및 명예회복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차용현씨는 추진위원장이 되었다. 그때부터 차용현씨는 감금과 감시를 당하며 살았다. “처음엔 나도 몰랐지. 경찰서에서 수동면에 전화하여 ‘차용현 오늘 뭐하냐’하면 면에서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어디냐’고 물었지. 서울에서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참석한 줄 알고 내 행방을 살폈지” 형사가 따라다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보고됐다. 유골을 발굴하겠다는 그를 마을 사람들이 말리기도 했다. “아직 정부에서 특별법을 발표하지도 않았고 연좌제도 폐지되지 않았던 터라 유골을 팠다간 봉변을 당할까 염려했지” 하지만 차용현씨는 마음이 급했다. “당그래산 인근이 점점 개발되고 있었어. 자칫하면 시신도 못 찾고 그곳이 개발돼 유골을 덮어버리게 생겼더라고”라며 당시 조급했던 마음을 설명했다.마을의 유복자가 43세가 되던 1991년 12월20일 유골발굴이 시작됐다. 현장에는 경찰들이 쫙 깔렸다. 사람들은 흙더미 위에서 삽질을 해 나갔으나 시신을 찾지 못했다. “잘못짚었나 했는데 옆쪽에서 파고 들어가니 유골이 나왔어. 흙을 걷어내고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찾아냈지”빨치산이던 여자유골까지 모두 찾아내 차에 싣고 마을로 돌아왔다. “경찰 차도 따라왔어. 그때 마음 같아선 경찰서 마당에 유골을 내려놓고 난리를 치고 싶었는데 꾹 참고 도북까지 싣고 왔지” 밤새 뼈를 만져 35인의 유골을 맞췄다. 1991년 12월21일 낮12시 도북초등학교 뒤 장자골 합동묘소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궂은 날씨 속에 치러진 장례식에서 유족들의 통곡 소리는 도북마을을 휘감았다. 43년 만에 원혼이 편히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족 중 한 명이 소유한 산비탈 밭에 마련된 합동묘를 제대로 꾸며놓고 싶었던 차용현씨는 전국을 다니며 협찬을 받았다. 1500만원을 모금하여 묘에 도래석이며 석등도 설치하고 비석도 세웠다. 1992년 1월18일(음력) 도북마을양민학살희생자 비 제막식이 도북마을 앞산 합동묘에서 유족, 주민, 각 기관장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비문은 전교를 한 효리 정순민씨와 차용현씨가 지었으나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 피해를 당할까 염려되어 비석 아래쪽에 작은 글씨로 추진위원장 차용현이라고만 새겼다.유족회 시 차용현님들이 뿌린 씨앗 단비 없이 자랐도다해 가고 눈서리 쳐도 피고지고 또 피나니한 맺힌 가슴 도려 산 넘어 내던지고세세연연 무릎 펴고 고이 잠드소서
이 시는 1992년 차용현씨가 직접 썼으나 당시에는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 한국전쟁전후 함양양민희생자 추모공원에 세워진 시비에는 시와 함께 그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이름을 밝힌 그는 “이제 나를 잡아간다 한들 죽을 날이 머지않았으니 무슨 일을 당해도 상관없지 않겠냐”며 기록을 남긴 속내를 전했다.
여기 서른두 사람의 가엾고 애처로운 혼령들이 있다. 서기 1949년 7월28일 도북마을에서는 통탄할 사건이 발생하였다. 민족의 분열을 꾀하던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으로 인한 사상전 때문에 흙냄새 풍기는 청장년 32인이 불행히도 함양읍 이은리 속칭 당그래산에서 국군의 오판에 의해 희생되었음이라. 43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역사의 뒤안길에서 철저히 버림받은 이들 애꿎은 원혼 앞에서 자손들의 애원과 망주의 통곡소리가 온누리를 메우는 가운데 1991년 12월21일 낮12시 32구의 유해는 이곳에 안장되었다.
유족대표 차용현씨가 지은 위령비 전문1992년 월간조선 2월호에 실린 도북양민학살사건을 취재했던 기자도 협박을 받았다며 마을 사람을 고문한 경찰의 이름을 빼기도 했던 때이니 그때까지도 혼란스러웠던 시절이었다.집단학살이 자행되었던 인당 당그래산은 핏물이 흘러넘치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그곳은 개발이 되어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차용현씨는 유골 발굴 후 역사의 현장을 기억할 수 있도록 그곳에 비석을 세웠다.
인당 당그래산 입구에 세워진 비석에는 ‘함양군 양민학살 도북마을주민희생보존지역’이라는 표식과 함께 “희생당한 영혼이여 영원한 안식 이루시고 이 나라를 길이 지켜 주소서”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연좌제에 묶인 사람들유족회 대표로 활동하게 된 차용현씨는 명예회복을 위해 청와대, 국방부에 호소문과 탄원서를 보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부터 호소문을 보내고 김영삼 정부 때까지 탄원서를 썼다. 돌아온 답변은 명예회복이 되어야 배상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경남도경찰청에서 경찰 세 사람이 조사를 나왔다. 마을 어르신을 모셔놓고 사건에 대해 일문일답을 가졌다. 경남도 경찰에 따르면 “함양경찰서에는 아무런 명단이 없어 죄목을 밝힐 근거가 없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도북마을 출신이 대구경북에서 경찰을 하다가 청와대로 발령이 났는데 신원조회에 걸려 못 가게 된 적이 있었다. 이유인즉 그의 큰아버지가 양민학살희생자였던 것이다. 명단이 없다면 이런 불이익도 없어야 했다. 이상한 것은 또 있었다. 차용현씨는 군 복무를 미군부대에서 했는데 탄약고에 일하러 갈 때는 그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의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군 복무 중 38선 철조망을 넘어 순찰하는 일에는 용현씨의 아들이 항상 배제됐다. 경남도 경찰의 말을 듣고 차용현씨는 경찰서장에게 달려가 “명단이 없는데 신원조회에는 어떻게 걸리냐”고 따지니 서장이 “명단이 있다”고 시인했다. 연좌제에 묶여 있었지만 차용현씨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명단을 가지고 정부를 대상으로 명예회복을 할 수 있다고 안도했던 것이다.잊지말아야 할 진실 선명하게 새기다
도북마을 사건의 진실 밝혀져1996년 ‘거창사건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시행됨에 따라 유족들도 서류를 넣었지만 1949년에 일어난 도북마을사건은 인정되지 않았다.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5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통과하여 같은 해 12월 본격적으로 위원회가 출범하여 2010년까지 활동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수동면 도북마을 사건이 접수되었다. 위원회에서 조사를 할 때 경찰서에 있던 명단이 근거가 되어 도북마을 사람들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었다. 하지만 함양군 마천면 사람들은 호적이 모두 불타 근거가 사라져 애를 먹었다. 포기하려는 사람을 붙잡고 차용현씨는 “할 수 있다”며 “호적이 없다면 족보를 가져와 살아남은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라”고 조언했다. 차용현씨의 기지로 이들도 접수하여 함양군 전체 총 181명이 2007년 최종결정통지서를 받았다. 이들은 양민학살희생자를 비롯하여 형무소사건(부산·전주), 국민보도연맹사건, 적대세력사건으로 희생을 당한 사람들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을 통해 호적정리, 사망자기록정리, 추모공원설치, 위령탑설치, 연좌제 폐지 등의 내용이 담겨있는 결정통지서를 받았다. 하지만 결정통지서는 한꺼번에 내려오지 않았다. 피해배상에 대한 내용도 언급되지 않았다.시효를 넘긴 국가배상청구소송유족들은 국가배상청구소송 시효가 3년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통지서에도 3년 내 배상청구 하라는 내용은 없었다. 유족들은 배상통지서가 따로 내려올 줄 알고 기다렸다. 181명 모두 결정통지를 받으면 함께 배상청구소송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법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유족들은 대구 조인호 변호사를 통해 시효가 3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변호사 덕분에 서둘러 알아보았으나 결정통지서를 일찍 받은 유족은 이미 시효가 16일이 지났고 늦게 받은 유족은 시효가 16일 남아 있었다. 차용현씨는 당시 박성서 군의장과 의회간사, 행정직 직원 등과 함께 진실화해위원회를 항의방문 하였으나 위원회에서는 배상을 해주라는 권리가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을 담을 수 없었다고 답변했다.유족들 중에는 시효가 남아있어도 변호사비가 아까워 접수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고 술 한잔 사 먹은 샘 치고 변호사비용을 대고 접수한 사람들도 있었다. 시효가 지난 사람은 변호사비를 절반만 내기로 하고 소송에 참여했지만 결국 배상을 받지 못했다. “억울한 건 다 같이 죽었는데 누구는 배상을 받고 누구는 못 받은 것이지” 국가배상청구소송에서 희생자에게는 8000만원, 배우자 4000만원, 자식과 형제는 각각 4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에 따라 총 22명이 배상을 받았다.함양군 한국전쟁 전후 양민희생자 위령탑 준공함양군양민희생자유족회는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 및 추모제를 수동면 도북마을 합동묘지에서 개최해 왔다. 위령제가 열릴 때마다 하늘도 슬피 우는지 비가 내렸다. 차용현씨는 “어쩐 일인지 행사 때마다 비가 와서 정용규 함양군수 재직 당시 위령각을 세웠다”고 밝혔다.차용현씨에게는 오랜 숙원사업 하나가 있었다. “희생자 181명의 유족 중 내 나이가 제일 많아.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나뿐이요. 내가 죽고 나면 이 역사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지. 이 일을 할 사람도 없어지고”차용현 회장은 죽기 전 해야 할 일. 사당을 지어 희생자의 위폐를 모실까도 생각했으나 세월이 가면 허물어질 것이니 돌에 이름을 새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돌에 새긴 이름은 몇 백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남아있을 것이라 믿은 그는 위령탑 건립을 위해 온 힘을 쏟아 올해 그 결실을 이뤘다.함양군의 5억의 예산을 들여 추모공원을 조성,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긴 위령탑을 건립하고 합동묘지의 조경을 새롭게 하고 비도 교체하였다. 함양군 한국전쟁 전후 양민희생자 위령탑이 건립된 자리에서 2021년 12월18일 추모공원 준공식이 열렸다.수백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도록 이름을 새겨 기억하고 싶은 영혼들. 양민희생자를 비롯하여 형무소사건(부산·전주), 국민보도연맹사건, 적대세력사건으로 희생을 당한 181명의 이름이 새겨진 함양군 한국전쟁 전후 양민희생자 위령탑을 보며 차용현 회장은 말했다. “이제야 나도 자유로워졌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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