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때 폴란드의 조그만 마을에 독일군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집으로, 학교로 몸을 숨겼고, 독일군은 마을 사람들을 학교에 모이게 하여 드문드문 섞여있는 유대인들을 끌어냈다. 죽음을 두려워한 유대인 어린이들은 한 선생님 앞으로 몰려왔다. “코르자크”선생이었다. 코르자크는 두려워하는 아이들을 두 팔로 꼭 안아 주었지만 독일군들은 선생과 아이들을 떼어 놓으려했다. 코르자크는 “가만 두시오. 나도 함께 가겠소!”하며 군인을 뿌리치며, 아이들을 향하여 “자, 우리 함께 가자, 선생님도 같이 갈 거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과 함께라면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코르자크 선생님은 아이들을 따라 트럭에 올랐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본 독일군들은 다시 선생님을 끌어 내리고자 했다. “어떻게... 내가 가르치던 이 아이들을, 사랑했던 이 아이들만 죽음으로 보낼 수 있단 말이오!”하며 선생님은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앞장서서 가스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다. 이후 히틀러에게 학살된 600만 유대인들을 애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세운 “Yad Vashem 홀로코스트 박물관” 뜰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두 팔로 꼭 껴안고 있는 코르자크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다. 코르자크는 어떻게 죽음의 두려움을 뛰어 넘었을까? 아이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가능했다. 믿음과 소망이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넘어서게 했던 것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4대 요소(Four Impelling Motives)는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두려움이라 한다. 가만히 보면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오는 증상이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소망이 없을 때 생기고, 사랑이 바닥났을 때 찾아오는 현상이다. 우리 시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삶, 가정, 직장, 정치를 위시한 모든 관계 속에 온통 두려움과 분주함이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참으로 불행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의 끝자락을 붙잡고 분주함에 함몰된 인생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나의 정체성”은 어디로부터 주어지는 것인가? “내 직업이 무엇인가? 내가 얼마나 가졌는가? 내가 무엇을 잘하는가? 못하는가?”의 능력의 문제가 “나의 나됨”을 결정할 수 없다. 고대 철학자 칸트는 인생에 대한 3가지 질문을 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원해도 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었다. 플라톤과 비트겐슈타인, 칸트와 니체, 아리스토텔레스와 하이데거는 신이냐? 인간이냐? 삶이냐? 죽음이냐? 신앙과 물질,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속에서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영향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여러 문제들의 근원에 닿아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먹고 살기 바쁘다고, 자식교육 때문에, 친구관계 때문에, 여러 분주함 때문에 묻어두고, 피해 버린 질문이기도하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이지만 경제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조차하지 않는 질문이다. 나는 오늘 무엇 때문에 분주하고,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가? 왜 밤잠을 설치고, 왜 고민하고, 왜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가? 2021년 신축년(辛丑年) 한 해가 역사의 뒤안길로 기울고 있다. 우리 삶에 깊이 스며든 모든 두려움의 요소들을 씻기어 줄 사랑과 희망이 가득한 연말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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