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상림다움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먼저 천년의 역사문화와 숲의 생명 다양성이 머리를 스쳐 갔습니다. 이것이 숲을 보는 관점이라면 나무를 보는 관점은 무엇일까 하고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우선 역사문화는 제쳐두고 숲에서 독특한 정체성[identity]을 갖는 각각의 생명을 떠올려 봤습니다. 상림의 숲속에 사는 다양한 생명이 다 소중한 존재이겠지만 이 중에서도 거대한 참나무류, 개서어나무와 나도밤나무 군락이 떠올랐어요. 숲에는 또 꿩의바람꽃, 가는장구채, 큰오색딱따구리, 원앙도 있고 하늘다람쥐도 있답니다. 하지만 가장 앞줄에 세울 수 있는 저의 상림다움은 졸참나무였어요. 그래서 나름의 근거들을 모아봤지요. 지난 6년 동안 상림에서 보고 느낀 졸참나무의 매력은 차고 넘칩니다. 천년숲의 거대한 졸참나무 군락은 숲을 떠받치는 기둥입니다. 거대한 군무는 장군의 호방함과 예술가의 섬세함을 두루 갖춘 장엄한 율동입니다. 이 점이 어떤 숲에서도 느껴보지 못할 황홀경으로 저를 안내했지요. 숲에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하면 하늘을 맞댄 연초록 뭉게구름이 손을 맞잡고 아지랑이 같은 파문을 일으킵니다. 어린잎들이 모여서 내뿜는 충만한 기운입니다. 멀리서 봐야지 스케일이 돋보이는 보드라운 생명의 물결입니다. 온전한 잎으로 자라날 어린 새싹 속에는 앞으로 펼쳐낼 생의 에너지로 가득합니다. 부풀어 오르는 봄의 기운은 그 장(場) 속에 있는 생명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어요. 봄이 오면 까닭없이 가슴이 부풀고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차는 이유랍니다. 녹음으로 우거지는 한여름의 졸참나무는 또 어떤가요? 이때는 뭇 생명들이 온통 아우성을 칠 때입니다. 활발한 몸짓들이 요란하게 얽히며 생태계의 거대한 장(場)이 꿈틀거리는 시기이지요. 짝을 찾아 번식하는 생존의 본능 앞에서 숲은 팽팽한 긴장과 활기로 가득합니다. 이때 졸참나무는 열두 대문 곳간을 열어두고 뭇 생명을 거두는 대갓집 같아요. 초대하진 않았지만, 무시로 드나드는 숙식객을 맞기에 바쁘거든요. 밥 먹으러 오는 넘, 잠자러 오는 녀석들이 상상 이상입니다. 그저 잠깐 쉬었다 가는 여행객도 많습니다. 상림의 졸참나무는 새와 곤충의 훌륭한 보금자리가 되어 줍니다. 직접 관찰한 새의 둥지만 해도 (큰)오색딱따구리를 비롯해서 물까치, 멧비둘기, 원앙, 검은댕기해오라기 등 다양합니다. 많은 곤충이 잎을 말아 집을 짓거나 수피를 뚫고 들어가 생활하기도 하구요. 사슴벌레는 썩은 나무 속을 파고 들어가 애벌레를 키우며 살고요. 졸참나무의 무성한 잎은 수많은 곤충(주로 딱정벌레, 나비와 나방의 애벌레)의 먹이입니다. 줄기에 흐르는 수액에는 말벌이나 파리 종류들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참나무가 많은 숲은 생명 다양성이 매우 높다고 하는군요. 남녘의 가을이 알록달록 색동옷을 입는 11월이면 상림의 졸참나무도 세월의 완숙미를 지긋하게 드러냅니다. 그 빛깔은 수수하지만 인생을 관조하는 지천명의 여인이나 가을 나그네처럼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호방하고 거뭇한 기둥이 하늘방석처럼 펼쳐낸 섬세한 가지마다 만엽 단풍이 꾸민 듯 안 꾸민 듯 내려다보지요. 그럼 우리도 고개를 맞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한 줄기 바람에 미련없이 떨어져 내리는 참나무의 낙엽들을 유심히 보신 적이 있는지요? 부드러운 바람결이 만드는 리드미컬한 자유낙하는 삽시간의 황홀입니다. 출렁출렁 마음으로 느껴보는 정서의 바다입니다. 졸참나무 도토리는 또 다른 매력을 지녔습니다. 짜릿한 무게로 연못에 떨어지는 소리는 뿅뿅뿅 하고 귀와 눈을 사로잡고요. 숲을 걷다가 떨어지는 도토리에 맞기라도 하면 아플 수도 있지만 한 편으론 천년숲의 행운일 수도 있겠네요. 이런 일도 거대한 나무에 도토리들이 수없이 많이 달리기 때문에 가능하겠지요. 실제로 숲길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는 어머어마합니다. 사랑스런 도토리는 원시 시대부터 농경사회에 이르기까지 굶주림을 해결해 주는 인류의 보조식량이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요즈음도 마을 주민들은 상림의 도토리를 주워가고 있잖아요. 겨울은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봄을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입니다. 내면으로 향하는 비움과 성찰의 시간이지요. 그리하여 거대한 졸참나무의 몸통과 가지의 형상은 오롯이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매력은 코끝이 싸~하고 정수리가 맑아지는 한겨울 중앙숲길을 걸으면 실감할 수 있어요. 졸참 장군들의 웅장하고 넉넉한 품속에서 온갖 종류의 나무들이 하나의 숲으로 어우러져 겨울잠에 든 모습도 관조할 수 있지요. 매서운 칼바람이 숲을 할퀴는 시간이 오면 어깨를 맞댄 숲의 진가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참나무는 원시 인류부터 인류 문명사에 자신을 내어준 고마운 존재입니다. 그 결과로 풍요와 문명의 상징이 되었고 ‘참’나무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오랜 세월을 이겨온 상림의 거대한 졸참나무 한 그루에는 생명의 북적거림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졸참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그러하니 천년의 숲에서 바라보는 졸참나무는 더더욱 ‘참’ 고귀한 존재가 아닐까요? 상림다움을 보여주는 천년숲의 정체성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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