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네 빛나는 눈썹 두어개를 떨구기도 하고/누군가 깊게 사랑해 온 사람들을 위해/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신비로와라 잎사귀마다 적힌/누군가의 옛추억들 읽어가고 있노라면/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곽재구 ‘은행나무’ 中-
몽탕한 기둥만 남은 가로수에 트리장식 전구를 칭칭 감아놓은 지난 연말의 거리에서 곽재구의 이 시가 또 떠올랐다. 가로수를 무자비하게 자른, 지성과 정서와 사랑과 추억과 문화적 사고가 결핍된 주체가 정확하게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누군지 모르는 그 주체에 대한 어떤 분노가 오색의 불빛과 함께 일렁거려 씁쓸했다. 나무에 장식전구를 감는 것은 20년도 더 늦은 유행이 번진 것이지만 그들은 그것도 행정전략의 일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잘라버린 나무기둥의 트리장식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통찰력이 결여된 우물안 시각이다.
한겨레(21.02.28)의 “벌목 수준, 가지없는 가로수”에는 기둥만 남은 가로수를 보고 아이들, 뭘 보고 배울까... 라며 시민단체가 받은 116건의 관련제보와 사진을 소개했다. 이어 국제수목관리학회의 가이드라인은 ‘가지의 25% 이내로 가지치기를 제한’하고 있고, 미국 워싱턴 자원국이 제작한 포스터의 ‘강전정(과도한 가지치기)은 안전하지 않다’는 내용도 실었다. 그러나 강전정을 시행한 이곳을 비롯한 곳곳의 그들은 이 기사를 읽었을지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산림청의 ‘가로수 조성 및 관리규정’에 가지치기 기준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문화경관에 대한 의식의 부재 문제가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사는 아파트의 목련나무도 기둥만 남겨놓고 잘라버렸다. 봄이면 번성하던 목련꽃을 바라보던 즐거움과 행복함은 사라져버리고 인간의 몰염치와 몰지각을 보는 듯해서 볼 때마다 심란하다. 나무 아래 주차된 자동차 위에 나뭇잎이나 꽃잎, 그 밖의 부유물들이 떨어진다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몽탕한 기둥만 남긴 것이다. 봄이면 벚꽃구경 가는 차량의 행렬과 가로수를 싹둑 잘라버리는 그 모순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신문에 게재된 기둥만 남은 가로수 훼손 사진들은 유럽의 가로수들과 대비를 이루며 슬픔을 자아낸다. 유럽사람들이 숲을 찾아 일광욕을 즐기고 나무에 기대어 책을 읽고, 가로수를 곁에 둔 도로변 카페의 야외석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는 정경, 나무들이 도시를 뒤덮고 있는 풍경을 바라볼 때 밀려오던 경이로움... 멀리있는 벚꽃은 보러가면서 일상과 가까운 가로수와 목련나무는 잘라버리는 그 이중적인 정서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 것인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나무들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을 때 슬픔이 느껴졌다는 초등학생의 독후감에 마음이 뭉클하던 것, 몇백년의 수령을 가진 나무가 견딘 삶의 무게를 상상할 때의 비장함과 곽재구의 ‘은행나무’ 마지막 문장, “희망 또한 불타는 형상으로 우리 가슴에 적힐 것이다”에 이르면 은유를 넘어 삶에 대한 사유가 증폭된다. 그러나 강전정과 얽혀있는 그들은 그 근처에도 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짠하다.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어떤 관대한 해석을 한다 해도 기둥만 남은 나무들은 가로수가 아니라 그저 흉물이다. 어떤 사람들은 장식전구를 감기 위해 나무 둥치를 임시로 설치한 것일 거라는 웃픈 말도 했다. 만물이 소생하기 위해 기지개를 켜는 3월, 가로수가 안간힘으로 뱉어내는 잔가지의 잎들은 무뢰한 인간을 꾸짖는 듯해서 민망하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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