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 함양의 상징 상림숲길을 지나 최치원역사공원의 고운기념관을 올라갔다. 고운선생 동상을 참배하며 세배를 대신하였다. 우한역병의 영향으로 폐관중이라서 안을 들어가 볼 순 없지만 이미 많이 본 것이라서 아쉬울 건 없었다. 개관 전부터 명칭문제를 건의도 하고 글도 썼으나 한번 정해진 방침은 바꾸기 어렵다. 권력자의 말 한마디면 금방 바뀌는데 말이다. 그래서 권력을 선호하는가보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이듯이 권력은 강철로 된 펀치인가보다. 고려시대 처음으로 문묘종사된 선현 문창후 고운 최치원. 문묘종사 제1호이다. 작년 2020년이 문묘종사 1000주년이었다. 유교의 총본산 성균관에선 기념행사도 했으나 여기 최치원역사공원에선 적막하였다. 탁영선생은 고운 생존시에 태어났다면 집편지사 곧 마부라도 달게 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워낙 청일하게 사시다 가셨기에 유교의 신선, 유선으로 추앙되었다. 내가 고운 당시 태어나 고운의 가르침을 받았다면 티끌 세상의 티끌 인간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학이 충만한 조선 중기에 오면 고운 추모 분위기가 성토 분위기로 확 바뀌었다. 불교에 아첨한 인간이니 문묘종사는 부당하다는 것이다. 삼교회통의 대유학자를 편견으로 보는 병폐이다. 다문화시대의 겨레의 스승이 될지 어찌 알았으랴. 인산선생은 고운은 단군의 환생 후신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인산선생은 고운선생의 환생 후신이라고 여기니 고운을 참배하면 일거삼득이 된다. 단군도 뵙고 고운도 뵙고 인산도 뵙는 것이다.고운기념관 현판을 바라보며 저 밑에 백연서원 현판을 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안에 사당을 조성하여 천령군태수 고운 최치원과 함양군수 점필재 김종직을 모신 백연서원 사당을 복원하는 것이다. 본향 2위에 안음현감 일두 정여창, 안의현감 연암 박지원의 위패를 추가하여 2인을 추향한다. 이 네 분은 함양사대목민관이니 함양사대목민관 기념서원으로 백연서원을 복원하는 것이다. 사당 명칭은 목민관묘라 한다. 고운기념관 옆 빈터에 강당을 신설하여 좌학우묘 형식으로 배치하는 것도 무방하겠다. 강당 명칭은 계원필경학당으로 하여 최치원고전을 강의하는 장소로 이용하면 좋겠다. 동재서재도 있어야 완벽한 서원규모가 완성되는 것이다. 서재는 최치원역사관과 서재 두 현판을 달고, 동재는 최치원문화관과 동재 현판을 달면 된다. 이 동재는 함양목민관기념관으로 겸용하는 것이다. 통칭은 백연서원, 최치원역사문화관으로 한다. 백연서원은 성균관의 유림서원으로 인준받아 유교활동하고, 최치원역사문화관은 박물관으로 등록하여 박물관문화활동을 하는 것이다. 백주대낮에 최치원산책로를 걸으며 백일몽을 꿈꾸며 비몽사몽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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