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의사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것은 30여년 간 응급실을 운영한 것이죠. 365일 24시간 병원에 붙어 있으면서 자유도 없었고 친구를 마음대로 만날 수 없었어요. 밥을 먹다 달려와야 했고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밤사이 대여섯번을 불려나온 적도 있어요” 함양성심병원 창립자 정해일(73) 원장이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1983년 현재 이 자리에 개원했던 함양성심병원은 지금까지 함양군민의 의료복지를 책임지고 있다. 당시 5명의 전문의가 뜻을 모아 병원을 세워 현재는 정해일 원장만 남았으니 이제 그도 성심병원 원장직을 벗게 된다. “여러가지 사정 상 은퇴할 시점이 왔다는 걸 알았어요. 떠나야할 때임을 느끼고 준비를 했어요. 지금처럼 성심병원이 함양군민을 위한 진료시스템을 제대로 갖춰 운영할 의지가 있는 원장에게 맡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오랫동안 공을 들였죠” 정해일 원장은 수동면 화교리가 고향으로 2남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중학교 수학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읍으로 나와 함양초·함양중·진주고 거쳐 조선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중앙대에서 일반외과 전문의를 땄다. 함양성심병원이 개원할 당시는 진주시에 종합병원 단 한 곳이 있던 때다.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성심병원이 환자에겐 유일한 희망이었다. 외과전문의였던 정해일 원장은 병원 구석구석에서 환자의 부름에 달려갔으며 응급실에서 내과, 피부과, 산부인과 등 모든 진료와 수술을 해내야 했다. “내가 도시에서 의사를 했다면 외과의사 밖에 안됐겠죠. 그 시절의 경험이 나를 지금 수준까지 높여줬다”고 했다. 정 원장은 그동안 위 수술만 1000여 건을 집도했다. 특히 쯔쯔가무시병, 대상포진, 맹장 등은 성심병원만한 곳이 없다는 환자들의 전언이다. “전국에서 내가 맹장수술을 가장 많이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함양성심병원이 맹장수술 가격이 가장 낮다고도 돼 있죠” 특히 정 원장은 쯔쯔가무시 치료는 최고 명의로 알려져 있다. “쯔쯔가무시를 진단하고 치료한 게 15년 쯤 지났을 때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발견한거나 마찬가지였지 않다 싶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응급상황이 수없이 뇌리를 스친다는 정 원장. 교통사고 환자로 피를 퍼내면서 30분 내로 집도한 일, 해충약을 복용한 후 너무 많은 디스토마가 죽으면서 쇼크로 실려 온 어르신, 독사에 물려 온 환자. “응급환자 이야기는 책으로 써도 몇 권 될 거에요.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급한 상황에서 진료를 수도 없이 했죠” 특히 함양에서 열린 결혼식 피로연에서 하객 수백명이 식중독으로 병원에 몰려와 정 원장의 빠른 처치로 모두 회복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성심병원이 아닌 다른곳에서 진료 받지 못한 환자 중 사망자도 나왔다. 오전7시부터 밤12시까지 병원이 집이나 마찬가지였던 정 원장의 삶을 묵묵히 지켜준 아내. 정 원장은 1남2녀의 자녀를 잘 키워 준 아내에게 “지금까지 좋은 곳 한번, 외국여행한번 같이 못갔지만 아내는 의사부인의 사명감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이해해 줬어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그래서 난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강인했던 정 원장도 건강을 헤쳐 힘들었던 시절도 있었다. 고혈압, 당뇨, 간 이식을 받은 후 이를 극복하고 다시 의사 가운을 입었다. “힘든 질병을 내가 앓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치료하고 치료방법을 환자에게 베풀었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니 무엇이 좋고 나쁜지 알 수 있었죠” 은퇴를 앞둔 정 원장은 “성심병원은 군민의 성원, 지지, 믿음 덕분에 지금까지 여러분 곁에 있는 것이다. 창업할 당시 목숨 다할 때까지 봉사하고 진료하겠다고 다짐했는데 40년 세월동안 성심병원과 인간 정해일을 예뻐해 주시고 믿어주신 마음 감사하며 평생토록 고마움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며 마지막으로 “의사의 삶이란 환자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낙이 없다. 조그마한 바람이 있다면 조그마한 진료시스템을 갖춰 건강이 허락할 때까진 군민들의 건강을 보살피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밝혔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