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사상 초유의 신종 코로나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 자영업자들과 상공인들은 죽을 맛이다. 전 세계적 재난이고, 국가적 재난이며 국민 개개인의 재난이다. 그러기에 시대를 원망하고 국가를 원망하고 있을 상황도 아니다. 이를 때일수록 전 국민이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간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어떤 농부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어보고는 너무나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담장 가득 메운 나팔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 보지 못했던 황홀한 꽃을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밖으로 나가 나팔꽃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즐겼으면 좋으련만 오늘은 밀밭을 갈아 놓아야 하니 빨리 밭을 갈고 돌아와 저 꽃을 즐기리라” 그가 저녁 늦게 밭에서 돌아와 보니 꽃은 시들어 낙화되고 없어져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농부는 창문 밖 나뭇가지에서 귀여운 새들이 아름다운 소리로 지저귀는 것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빨리 젖소들의 우유를 짜 놓고 저 아름다운 새 소리를 즐기리라” 농부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새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또 다음 날 아침 농부는 집 밖에서 말발굽 소리를 듣고 일어나 문을 열고 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백마 한 마리가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면서 농부를 향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마치 농부에게 어서 빨리 와서 승마를 즐기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농부는 “오늘은 빨리 나가 동편에 있는 울타리를 수리해 놓고 저 훌륭한 백마를 타며 즐겨보자”하고는 급히 일하러 나갔다. 일을 마치고 황급히 돌아와 보니 그 아름다운 백마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농부는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신기한 일들을 즐기기 위해 다른 일들을 멈추고 시간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도 실천해 보지 못한 채, 어느 날 한 생을 마치고 말았다. 일에 쫓기며 취하여 살다가 할 일을 등한히 한 결과 결국은 크게 진작 할껄! 하며 후회하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구분했다. 크로노스는 일정하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이다. 가령 1년, 하루, 한 시간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시간, 즉 ‘객관적’인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간다. 막을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다. 크로노스 앞에서 인간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역동 우탁 선생은 고려 말에 지은 ‘탄로가’에서 “한 손에 가시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드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고 탄식했는데, 역동 선생이 한탄한 시간이 바로 크로노스이다. 반면에 카이로스는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이다. 시간이 길다거나 짧다는 것은 물리적, 객관적 길이에 따른 판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루를 한 시간처럼, 또는 한 시간을 1년처럼 느낄 수도 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은 시간이 빠르게,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라는 말은 더디게 감을 나타내는 말인데 이때의 시간이 카이로스이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인 카이로스에는 사람의 마음과 의지가 개입될 수 있다. 마음과 의지가 담긴 특별한 시간이며 우리가 능동적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때’나 ‘기회’이다. 위기가 곧 기회다. 사람들은 위기가 오면 힘들어 한다. 위기를 절망하고 패망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발판으로 삼아 성공과 성장의 기회로 삼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그 사람에게 달려 있다.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이전보다 더 위한 인물로 거듭난 사람들이 종종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정약용도 그렇다.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탁월한 학문적 진보를 이루었다. 18년 동안 50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위기를 기회로 멋지게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1997년 IMF 외환 위기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굵직굵직한 위기들을 경험했고, 또 이를 슬기롭게 잘 극복했었다. 코로나 정국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슬기로운 민족이 되었으며 한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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