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사람들은 다 좋다고 하는데 너는 꼭-”다 좋다는 설민석의 프로그램에 왜 딴지를 거느냐고 친구가 내게 했던 말이다. 설민석에 감탄할 때마다 “딱 학원강사던데? 수강생 관심끌기용 언어구사에... 마치 변사辯士같지않아? 그래도 전문성을 가진 게스트가 있어서 다행이더라만...” 등, 책 읽어준다는 프로그램을 보고 찬물을 끼얹는 나를 친구는 불편해 했다. 견해의 다양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어서 불편한거라고 하니 “그럼 너는 안보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마침내 설민석의 문제가 터졌다. 최근 tvN에서 방영한 ‘벌거벗은 세계사’의 ‘히틀러’편과 ‘클레오파트라’의 편에 오류가 많다고 지적한 이집트 고고학자 곽민수의 글이 논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전문성을 요구하는 소재를 다루는 것 자체가 무모했는지도 모른다. 설민석의 논란은 ‘벌거벗은 세계사’ 뿐 아니라 유사한 다른 프로그램에서 이미 불거졌던 오류와 왜곡이 다시 불거지고 역사가 아닌 재즈음악에 대한 선도 넘었다는 보도도 등장했다. 이어 ‘석사논문 표절의혹’ 기사가 뜨고, 몇 시간 후 결국 당사자가 표절을 인정하고 TV의 모든 프로그램 하차의사를 밝혔다. 오류가 거듭 반복된다는 것은 시청자를 우롱하는 일이므로 당사자에 대한 불신은 물론, 텔레비전을 비롯해 그와 관련된 매체의 정통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설민석의 얄팍한 앎이 문제인지, 예능을 추구한 텔레비전의 요구가 반영된 구조적 문제인지, 자극을 선호하는 시청자 성향의 문제인지, 이 모든 것의 종합인지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상업적 속성을 가진 텔레비전은 시청자들이 어렵고 수준높은 프로그램은 외면한다는 것을 꿰뚫고 있다. 시청률에 급급한 현실에 놓여있다는 것도 아는 일이다. 보여주는 것을 그대로 믿는 대중들의 문제가 더 컸을지도 모른다. 가치나 본질보다 찰나의 재미에 시간을 쏟는 사람들이 많으니 가벼운 예능에 편향되고, 진위에 무감각하니 가짜가 전성을 이루는 것이다. 곽민수의 지적은 그런 의미에서 반가운 일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은 ‘정작 보여주어야 할 것과는 다른 것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텔레비전 영상의 특수성에 대하여 ‘보이게 하는 것을 보게 하고 믿게 할 수 있으며 이같은 강신술의 힘은 동원mobilisation의 효과를 갖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회가 텔레비전에 의해 설명되고 지시받는 세계로 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중매체의 이같은 특성에 대해서는 피에르 부르디외 뿐 아니라 알랭 드 보통이나 롤랑 바르트도 각자의 방식으로 유사한 맥락의 글을 쓴 바 있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트랜드를 주목하지, 책을 주목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은 많은 정보를 전달하여 시청자의 눈을 밝혀주기도 하지만 과장과 편견을 조장하기도 하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설민석의 강의는 시청자를 가르친다는 상징이 되므로 사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보이지않는 시청자들의 지적 다양성을 가볍게 보았고 텔레비전은 이를 방관함으로써 역기능의 역할을 자행한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곽민수의 지적도 진일보한 현상이지만 SNS에 그의 글을 공유하는 일반인의 인식도 변화했다. 의심하기 시작하고, 진위를 분석하고, 비교하고 대조하며 믿고 안믿고는 자신들이 결정한다. SNS에도 편이 나뉘어지고 가짜와 억지가 양산되는 인간사회의 한 부분이지만 논리와 근거의 중요성을 깨우치면서 가짜가 가짜임을 기어이 밝히기도 하는 개인의 자유로운 공간이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이야기다. 버클리의 “존재하는 것, 그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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