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넘어 서른이 되기 전에 한 공중파 라디오 방송국에서 잠시 리포터를 한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은 구성작가가 따로 있었는데 진행자인 아나운서는 작가가 써준 원고를 그대로 읽었다. 방송을 워낙 오래 해온 베테랑 아나운서라서 그런지 눈으로 한 번 죽 훑어보고는 바로 진행을 했다. 그런데도 실수없이 잘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나는 정규 스피치 아카데미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정규 방송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어깨너머로 혼자 어설프게 배운 방송 초보였기에 그저 그 아나운서 언니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지나고 무대 경험도 않아진 나는 무대에 따라 원고 없이도 행사 진행이 가능하다. 지난 11월,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가 낮아져서 운 좋게도 음악회 사회를 두 군데나 보았다. 코로나 때문에 음악, 문화, 예술 행사들이 거의 취소되거나 축소되는 바람에 수입원이 줄어서 힘들고 답답했던 터라 조금이나마 기분전환이 되었다. 하나는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열리는 윈드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 사회였고, 다른 하나는 거창에서 열리는 가수초청 음악회 사회였다. 물 만난 고기 마냥 준비하는 과정부터 진행하는 동안 내내 즐겁고 행복했다. 먼저 진행한 성산아트홀에서 열린 음악회는 일단 규모가 크고 인지도가 높은 곳이라 꼼꼼하게 멘트를 쓰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멘트를 보고 몇 번씩 실제 무대를 머릿속에 그리며 연습을 한 후 무대에 섰다. 시간이 갈수록 분위기에 빠져들었고 준비한 멘트에 현장에서의 상황을 버무려 잘 끝낼 수 있었다. 사실 음악회를 연이어 진행하다 보면 앞에 맡은 음악회에 신경을 쓰느라 뒤에 진행하는 음악회는 탄탄하게 준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거창 음악회가 그랬다. 하지만 거창 음악회는 작은 규모의 장소에서 열리고 가수를 초청한 음악회라 해도 특정 분야 동호인들의 음악회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잘 모르는 곡들만 찾아 들어보고 원곡 가수와 곡에 관해서만 조금 공부했을 뿐 즉석에서 생각나는 대로 편하게 하자는 마음으로 무대에 섰다. 현장의 모습을 잘 활용해서 관객들과 호흡하며 출연진과 하나 되었고, 실수마저도 재미있고 따스하게 만들어갔다. 앞서 진행한 음악회보다 훨씬 즐거웠고 행복했다. 관객과 출연자와 진행자가 하나 되어 소통하는 음악회, 기쁨 가득한 음악회였다면 진행원고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러나 무대에 자주 서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무대에 자주 서 본 나도 특별한 무대를 제외하곤 지금까지 진행원고를 직접 쓰고 있다. 물론 방송국 전문 아나운서들은 주로 구성작가가 써준 원고를 가지고 그대로 방송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으며 숙달되어 당연히 흐름만 알아도 진행을 잘할 수가 있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인 것이다. 내 아이들이 다녔던 초등학교에는 윈드 오케스트라가 있는데 나는 그 정기연주회 사회를 5년 동안 봐 준 경험이 있다. 첫해에 담당 선생님이 진행자 멘트를 정성껏 써서 아이들 편으로 보내주었다. 그런데 그 멘트를 읽어보니 내 입에 착착 달라붙는 말들이 아니었다. 그것을 외우려고 해봤지만 외우는 시간이 훨씬 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직접 썼다. 오프닝부터 프로그램 순서대로 진행자가 무대로 나가야 할 부분에 곡의 느낌과 현장 분위기를 생각하며 쓴 것이다. 쓰는 동안 내용이 거의 머릿속에 입력이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외워졌다. 남이 써준 원고는 어쩐지 어색하고 잘 맞지 않아 마치 남의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 든다. 무대에서 사회를 보거나 여러 사람 앞에서 스피치를 할 때 써준 원고만 읽었다면 이제부터는 본인이 직접 써보기를 바란다. 나만의 이야기로 나만의 언어로 써야 말에 힘이 실리는 법이다. 가장 나다운 원고가 감동을 주며 나다운 원고는 나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원고는 직접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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