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두세 번 밥 도장을 꼭꼭 찍고 가는 길냥이 서리가 오늘 아침엔 지각을 했다. 무슨 바쁜 일이 있었는지 뒤늦게 와서 밥을 달라고 냐옹냐옹 한다. 알았써~ 알았써~ 하고 사료를 한 그릇 내어주니 맛있게 먹는다. 먹다가 잠시 내 발목에 목덜미를 몇 번 비벼주고는 다시 앙앙 소리를 내며 우적우적 먹는다. 서리는 처음엔 밥만 먹고 뒤도 안돌아보고 가는 녀석이었다. 수리 밥을 서리해 먹는다고 돌림자를 써서 서리라고 불렀는데 이젠 제법 인사치례도 한다. 요즘 냥이 털이 많이 빠지는 시기라 녀석이 목덜미를 비벼대면 꼬재꼬재한 털이 많이 묻지만 호의로 내미는 손을 잡아주지 않을 수는 없다. 서리는 잠을 어디서 자는 지 석탄 광부 같다. 시골에 빈 집이 많으니 아궁이 속에서 자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리산 자락 외진 우리 집에 길냥이 서리가 나타난 건 지난해 여름이었다. 정원에 장미와 겹접시꽃이 절정이었으니 유월 초순이었을 것이다. 돌담을 따라 분홍 겹접시꽃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서리는 첫인상이 길냥이의 고단한 삶이 만져질 정도로 왜소해보였다. 영양부족이었다. 등가죽은 아부지 옷을 빌려 입은 양 쭈글쭈글하고 등줄기를 따라 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살이 거의 없었다. 마침 현관 앞 데크에서 수리가 밥을 먹고 있었는데 서슴없이 다가오더니 쓰윽 밀치고 우적우적 먹었다. 나는 가까이 가면 도망칠까봐 방해가 되지 않게 멀리서 지켜보았고 수리도 엉덩이를 붙이고 허겁지겁 먹는 서리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개죽사발처럼 싹싹 핥아먹은 서리는 지체없이 돌담을 넘어 사라졌다. 근데 너 누구니? 하며 수리가 슬금슬금 따라갔지만 서리는 뒤도 안돌아보고 사라졌다. 왜소와 앙상을 그림으로 그린 것 같던 서리가 꾸준히 밥 도장을 찍더니 어느 순간 더 이상 허약해보이지는 않게 되었다. 그래도 정상이라고 할 만한 체격까지는 아니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겨울 내내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꾸준히 서리는 왔다. 이렇게 성실한 녀석이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 의대라도 합격했을 거다. 그런데 하루는 서리가 피를 뚝뚝 흘리며 와서 깜짝 놀랐다. 마당에 핀 노란 민들레 위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으니 초봄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서리는 자기 몸을 만지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가 아무리 심해도 병원에 데려갈 수가 없었다. 내가 빨간 약도 발라줄 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밥만 먹이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상처는 덧나지 않고 차츰 아물었다. 그런데 상처가 아물만하면 또 반대쪽에 피를 철철 흘리며 왔다. 결국 아물기는 하지만 털이 빠진 자리에 깊은 흉터는 험상궂어 보인다. 서리의 상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지금 와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내린 결론인데 서리는 영역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부상을 당했고 아직도 박이 터지도록 싸우고 있다. 그럼 영역 안에서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일까? 답은 한 가지, 서리는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암고양이를 비열한 불량 수코양이들로부터 지켜주고 보호해주려는 것이다. 짐작컨대 엄천 골짝에서 올 봄에 태어난 냥이의 상당수는 서리의 자손일지도 모른다. 서리가 비록 남의 집에 밥을 얻어먹고 다니지만 엄천 골짝 냥이의 세계에서는 리더일지도 모른다. 조직의 리더가 되기엔 나폴레옹처럼 사이즈가 좀 작긴 하지만 불굴의 정신으로 싸워 골짝의 평화를 지키고 있는 영웅일지도 모른다. 양 볼때기에 빛나는 무공훈장은 그걸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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