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을 바라볼 때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사물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같은 사물을 놓고 찍는 각도에 따라 사물은 다르게 나타난다. 현대에서 과학의 기술은 종종 실체와 허상을 혼돈하게 하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달리 보인다고 본체의 모양이 실제로 달라지지는 않는다. 본체는 달라지지 않지만 본질은 달라질 수도 있음을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반쯤 찬 술잔의 비유를 들며 ‘이런, 반밖에 남지 않았네’와 ‘어머, 아직도 반이나 남아 있네’라는 표현을 놓고 부정주의자와 긍정주의자를 가름하는 잣대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이 말 속엔 벌써 선을 그어 놓은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한다. 좋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좋은 쪽으로 긍정의 편,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부정의 편이라는 전제를 이미 깔아 놓고 선택을 해보라는 판결문 같은 것이 숨어 있다. 부정적이라고 해서 나쁜 것임을 단정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한다. 건강한 함양을 위해 쓴 소리를 자주하며 오랫동안 논설을 써왔지만 조금도 바뀐 것이 없어 헛소리만 한 것 같아 씁쓸하다.
지리산을 품고 있는 웰빙 함양이 좋고 사랑스럽고 행복하고 살기 좋은 고장이란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함양 안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왠지 슬프고 비어있는 듯한 느낌이 온다. 우선 정치가 기댈 것 없는 부정에서 오는 무기력 때문인가? 그도 그럴 것이 두 번 세 번 네 번. 이 고장의 수령이 꼭 큰집을 갔다 온다. 이번은 괜찮을까? 글쎄... 두고 볼일이다. 공무원들의 오만함과 청렴도 꼴찌. 이 허망을 누가 달래고 이럴 수밖에 없는 함양에 대해 분노와 자책은 누가 치유할 수 있단 말인가? 잘못된 행정에 대해서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이 없고, 말해 봐야 소용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사회의 목탁이라고 하는 언론마저 현장은 없고 앉아서 기사를 쓰고 너나 할 것 없이 이해에 따라 움직이니 참으로 부끄럽다.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는 보행권, 기초질서의 붕괴, 손댈 수 없는 주차의 혼잡, 산적으로 쌓여있는 쓰레기와 음식물 분리수거와 시민의식, 난해한 공공사업의 시끄러운 잡소리, 없는 단체가 없는 수많은 단체의 난립, 누가 원한 건지도 모를 쓰잘데 없는 보이기식으로 난무하는 공공 공사들. 공청회도 없이 밀어붙이는 각종 기관의 확대과 산삼축제의 무분별한 투자와 실패, 책임지는 사람 한명도 없는 그래서 그 많은 군의원들은 무엇을 하는지, 있기나 한 건지, 군의원이 필요는 한 건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마지막 통신이니 이것 하나만은 꼭 전하고 싶다.
함양 천년의 숲 상림은 제발, 그냥 숲으로 놓아두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빈다. 상림의 몰골을 보기 바란다. 이건 천년의 숲이 아니라 동네 공원만도 못하고 온갖 잡동사니가 다 들어서서 장사하는 시장터로 몰골만이 남아 천년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 나무는 몇 그루밖에 없고 분칠해 놓은 꽃밭이며 한명도 찾지 않는 폐가며 박물관이며 산삼전시관이며 숲보다 더 큰 주차장이며 제발 상림을 숲으로 놓아두기를 간절히 바란다. 있는 것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판에 또 무슨 건물을 꼭 상림에 짓겠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미친 사람들 같다. 숲은 나무가 주인이다. 숲을 숲으로 돌려달라. 나의 마지막 통신이 저 높은 곳에 앉아있는 사람의 귀에 닿기를 바라지만 그게 가능한 일일까?
논설위원으로 글을 써온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쉬어야 할 때인 것 같아 이 마지막 통신으로 작별인사를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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