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야누스(Janus)는 얼굴이 두 개인 문(門)의 수호신(神)이다. 야누스는 하늘의 문지기로서 안과 밖의 경계에 있는 미래와 과거를 모두 볼 수 있다. 평화로운 때에는 자비로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전쟁이 나면 잔혹한 얼굴로 바뀐다. 서로 상반된 성질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신화학자인 토머스 불핀치(Thomas Bulfinch)는 “모든 문은 두 개의 길에 맞닿아 있으므로 야누스는 하늘의 문지기 수호신으로서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했다. 또한 고대 사상가들은 일체의 모든 사물에 정(正)과 반(反) 두 면이 있음을 봤고, 음양(陰陽)으로 만물의 성장과 소멸을 해석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모습은 일월(日月), 천지(天地), 주야(晝夜), 남녀(男女), 흑백(黑白), 등 두 얼굴이 맞닿아 살고 있다. 때로 우리는 선(善)과 악(惡)의 두 얼굴을 가진 이중적인 사람을 야누스적 인간이라며 깎아내리기도 한다. 작금, 우리 군민 모두는 “청정 함양”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며 길을 걸어왔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문(New Door)이 열렸다. 지난 주간 우리 함양에도 코로나19(COVID-19) 확진자가 나왔다. 2차, 3차, n차 감염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두 개의 길이 맞닿아 있는 변곡점(變曲點)에 서 있다.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고 책임을 물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야누스적인 상황을 다스려야하는 지혜가 필요한 지점이다. 예사롭지 않은 지혜를 요구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지만, 장기화로 이어지면 가계와 생업에 위협을 가(加)하는 두 얼굴이 된다. 하여 지금은 양극단의 가치를 부둥켜안아야 하는 융통성을 발휘하며 우리의 두 얼굴을 안과 밖의 경계로 더 몰아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뉴 노멀(New Normal)이다. 새로운 일상이 자리 잡고 새로운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경제, 사회, 문화의 새로운 표준이 요구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체로키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삶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다. “우리 마음 안에서는 늘 싸움이 일어난단다. 그것은 너무 끔찍한 싸움이어서 마치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는 것과도 같단다. 하나는 악이라는 놈인데 이놈은 분노,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교만, 거짓, 허영으로 나의 거짓된 자아로 나타난단다. 또 다른 놈은 선이라는 놈이란다. 이놈은 기쁨, 평화, 사랑, 희망, 친절, 관대함, 진실, 신뢰로 나타난단다” 계속해서 노인은 “이 싸움은 네 마음 안에서도 일어나고, 모든 사람들 마음에서도 일어난단다” 손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할아버지는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혹자는 “행복과 불행이, 즐거움과 괴로움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나 온 길이 아닌 새롭게 가야 할 길을 직시(直視)하고자 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야누스의 두 얼굴은 우리가 처한 상황의 얼굴인 동시에 우리 마음의 또 다른 얼굴이다. 뉴 노멀 시대를 살아가며 역동적이면서도 절제하는 공동체, 공공(公共)의 평등이 실행되면서도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공동체로 우리 군정과 사회가 세워지기를 바란다. 야누스의 두 얼굴은 우리를 선택의 갈림길에 세워두고 먹이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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