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꽃님이 시집갈 때 부라더 미싱’이란 광고가 나오던 그때는 미싱이 대중화되어 집집마다 보급되던 시절이다.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값을 치르겠다며 미싱을 사가던 손님도 있었다는 그 때, 함양에도 ‘부라더 미싱’이 문을 열었다. 1969년 9월 군대를 제대한 양도운(78)씨는 장사밑천 80만원으로 미싱 10대를 들여놓고 제일약국 옆 현재 위치에서 가게를 시작했다. 50여년 이곳에서 일하며 집도 사고 자식들도 키워냈다. 한 때는 미싱이 날개 돋친 듯 팔렸지만 기성복이 나오면서 양복점이 문을 닫고 자연스레 미싱을 찾는 이도 드물어졌다. 하지만 함양의 ‘부라더 미싱’은 굳건하게 이곳을 지키고 있다. 양씨는 “나에겐 퇴직금과도 같은 것이지. 60에 공무원으로 퇴직한 친구들도 날 부러워한다니까. 지금도 난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일세” 가게를 지키는 양도운씨는 이제 미싱을 팔기보다 수리하는 일이 전문이다. 함양, 산청, 거창, 남원 등 마을에서는 아직도 미싱을 돌리는 집이 많다. 고객이 부르면 출장을 간다. “동네마다 사람들이 전부 나를 알거야. 함양에서 나 모르면 간첩이지. 함양에 내 팬이 수천명 깔려 있다니까”고객 중에는 80이 넘은 어르신이 아직도 삼베옷을 직접 만들어 입는 분도 있다고 했다. 가난한 시절을 살아온 어르신들은 버리는 것에 인색하다. 옷이며 이불이며 깁고 또 기워 쓴다. “자식에게 재봉틀을 고쳐 달라고 하면 자식들은 무시하며 버리라고 한다네. 하지만 그 어르신께 미싱은 노리개야. 장난감 같은 거지” 50년을 미싱만 만져온 양도운씨다. 어떤 미싱을 내놔도 뚝딱 고쳐낸다. 요즘 나오는 미싱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다. 기능도 다양하고 매우 복잡하다. 하지만 양씨는 요즘 제품보다 옛날 미싱이 훨씬 좋다. “옛것은 전부 쇠로 만들어져 있어. 플라스틱처럼 쉽게 깨지지도 않아. 간단하면서 튼튼해. 미싱의 최고봉은 역시 100년도 더 된 ‘싱어미싱’이지” 양씨가 최고급 싱어미싱만 손봐주는 건 아니다. 녹이 슨 부모님 유품도 기름칠을 해 새것처럼 만들어 준다. 사용할 줄도 모르는 미싱을 가져오면 쓸 수 있게 방법도 가르쳐 준다. 30여년 전에는 여중생들이 학교에서 미싱을 배우기도 했는데 그때는 학교에 나가 미싱을 고쳐주고 가르쳐주기도 했다. 양씨는 “미싱 수리는 공식이 없어, 경험이지. 미싱은 한끝차이로 작동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해. 바늘이 너무 많이 내려가면 부러지고 올라가면 실이 끊겨. 바늘구멍에 1mm라도 비껴가면 안돼. 하나라도 어긋나면 바느질이 안되는 거야” 50년간 닦아온 수많은 경험이 양씨의 재산이다. 미싱을 분해하면 100여개가 넘는 부품이 나온다. 하지만 이걸 조립한다고 해도 바느질이 안되면 헛일. 미싱 부품을 제 위치에 가져다 놓은 뒤 마지막 한 끝의 섬세함이 필요하다. 이것이 양도운씨의 기술, 오로지 경험으로만 터득할 수 있었던 그만의 노하우다. 함양, 아니 거창, 산청 인근까지 유일하게 남은 미싱 가게 ‘부라더 미싱’. ‘수시로’는 아니지만 ‘때때로’ 찾는 고객이 있기에 양씨는 오늘도 ‘부라더 미싱’ 문을 연다. 100살까지 살아달라는 고객의 청이 있기에 그는 건강해야 한다. “기계는 멈추면 쓸모가 없어지고 쓸수록 가치가 있는 법이야. 미싱이 돌아가는 한 내 일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양씨의 말에 자부심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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