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숲은 농경 생활의 전통이 배어있는 넉넉한 품이다. 주민들과 공감을 이어 온 고향의 언어이다. 오랜 숨결이 새겨진 지역의 역사현장이다. 함양상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마을숲(정확하게는 고을숲)이다. 실제로 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온 숲은 전국에서도 드물다. 여기에 생태적 다양성을 더해 함양상림은 일찍이 천연기념물이 되었다. 그러면 함양상림의 가치는 무엇일까?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자. 먼저 생태·환경적으로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함양상림은 중산간지대에 형성된 하천숲이다. 그래서 산지하천의 선상지 식생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함양상림의 지형이나 위치에 따른 식물종의 분포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을 것이다. 숲에는 나무가 100여 종, 그 아래에 초본식물이 또 100여 종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외부 유입종까지 포함한 수치다. 이 정도면 아주 많은 식물종이 살고 있는 마을숲이다. 자연히 이 속에서 사는 생물의 다양성은 뛰어날 수밖에 없다. 보통의 마을숲은 소나무나 개서어나무의 단일종이 아니면 느티나무, 팽나무 등 몇몇 종이 섞여 자라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면 하층 식생은 볼품이 없을 수밖에 없다. 생물종의 다양성은 함양상림의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역사·문화적 가치는 또 어떨까? 함양상림은 사나운 위천의 다스림과 최치원이라는 영웅적 인물의 위민정신이 녹아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덕분에 한들이라는 커다란 농지와 읍 단위 규모의 주거지가 생겨났다. 최치원은 주민들이 천년숲을 지켜오는 데 구심적 역할을 해왔다. 주민들에게 커다란 상징성을 심어주었다. 상림은 함양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핵심장소이다. 주민들에게 상림은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물으면 엄마 역할, 울타리, 마음의 안식처, 랜드마크, 종합예술의 장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상림에 대한 상징성과 애정이 듬뿍 담긴 대답이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고 흐뭇하다. 이 마음들 속에는 최치원 선생에 대한 존경이 녹아있다. 이러한 존경심이 선생을 숲의 유래와 전설 속 영웅으로 탄생시켰을 것이다. 그 밖에도 주민과 더불어 천 년을 이어온 수많은 삶의 이야기와 경험들이 숲을 감싸고 살아 숨 쉰다. 대홍수의 영향과 숲의 변천, 함양 선비의 풍류 문화, 서민들의 놀이문화, 농경 생활 과의 연결고리, 토속신앙의 이야기들이 있다. 현대에 와서는 사진·그림·음악 등의 취미활동, 사색, 맨발 걷기 등 휴식과 치유 활동 등을 체험하고 즐기는 휴양·치유의 숲 역할도 하고 있다. 농경문화적으로는 어떨까? 하천숲을 이용하여 홍수로부터 마을과 농경지를 보호한 지방관의 위민정신이 돋보이는 대역사의 현장이다. 위천과 대관림, 한들 그리고 함양읍의 형성은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하천의 이용과 농지·주택관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덕분에 식생활이 윤택해지고 실생활은 안정을 찾게 된 것이다. 마을숲은 자연경관림, 재해방지림, 역사문화림, 토속신앙림, 휴양치유림 등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한다. 이 중 하나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을숲도 많다. 함양상림은 모든 기능과 역할을 지닌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마을숲이다. 하나의 마을숲이 이렇게 다목적으로 이용된 사례는 전국에서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생태와 천년의 역사문화를 아우르는 소중한 우리의 자연문화유산이 되고도 남지 않겠는가. 전문가들은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마을숲의 형태라고 한다. 고목 아래 살포시 돋아난 풀 한 포기, 숲속의 물길을 따라 들어앉은 돌멩이 하나도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숲속에는 자연식생 외에 숲을 관리하면서 심거나 묻어온 식물도 많다. 이들 식물은 숲의 생태변화와 교란을 안겨주고 미관을 해치기도 한다. 여러 종의 식물은 이미 숲의 일원이 되었고 아직 숲의 언저리에서 이방인처럼 어색한 식물도 있다. 사람들이 살았던 주거지와 여러 문화재와 인공구조물도 숲의 훼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부터가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숲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정화작업과 보전 사이에서 가치의 혼란을 겪기도 한다. 민원도 있고 해서인지 두어 해 전부터 산책로 주변 숲 가장자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숲 가장자리에서 자라고 있는 귀한 식물의 생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한 무리의 꽃을 피우고 가을날 빨간 열매를 흐드러지게 늘어뜨렸던 윤노리나무 가지는 토막이 났다. 산책로 곁의 길마가지나무는 통째로 잘려나갔다. 제일 크고 수형이 뛰어난 나무였다. 아주 일찍 꽃을 피우는 상림에서 몇 그루 없는 귀한 나무이다.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는 짚신나물 같은 초본류도 잘려나갔다. 깊은 산 자생지에서나 볼 수 있는 꿩의바람꽃은 예전엔 숲에 많았다고 하지만, 압도하는 꽃무릇 군락 속에서 수난을 당하고 있다. 이 무겁고 힘겨운 경쟁 속에서 몇몇 개체들이 살아남아 애처롭게 피우는 꽃을 볼 수 있는 것이 아직은 천만다행이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마을숲은 오랜 풍상에도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위기에도 꺾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양상림도 우리가 볼 수 있고 누릴 수 있다. 요동치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살아 남아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수많은 마을숲이 사라져 갔다. 그러나 상징성을 지녔거나, 아름다운 경관을 지녔거나, 규모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크다면 사정은 달랐다. 함양상림은 이 모두에 해당한다. 그래서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숲은 아니었다. 하지만 함양상림은 주변의 도시화와 자연환경의 위축으로 절멸의 궁지에 몰려 있다. 해마다 상당한 수(20여 그루는 될 것 같음)의 고목들이 쓰러져 간다. 아말라리아 뿌리썩음병과 여러 병충해의 영향이라고 한다. 쇠약해진 고목들이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이런 환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뿌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허약해진 가지가 떨어져 내리는 나무도 많다. 외래곤충인 갈색날개매미충이나 꽃매미의 영향도 숲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곤충들은 나무의 즙을 빨아먹고 잎에 그을음을 입혀 광합성을 방해한다. 담당 부서에서는 나름의 관리를 하고 있지만, 가을철 주말이면 하루 방문객이 5000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미 자연을 벗어난 현대 인류가 내뿜는 공해를 상림의 고목들은 언제까지 견뎌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영향으로 숲은 이미 중병에 시달리고 있다. 행정의 최고 책임자부터 담당까지 올바른 관심을 일깨우자. 생태·문화적 전문성을 지닌 담당자를 두자. 주민들과 아이들에게 천년숲의 가치를 알려주자.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지금이 가장 빠른 때이다. 이 소중한 천년의 숲을 잘 관리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세월의 강은 한 번 건너면 돌아올 수 없다. <연재끝>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댓글0
로그인후 이용가능합니다.
0/150
등록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복구할 수 없습니다을 통해
삭제하시겠습니까?
비밀번호 *
  • 추천순
  • 최신순
  • 과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