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을 처음 갈 때 비행기를 타본다는 설렘이 여행보다 더 컸었다. 그러나 검색대를 통과하고 만나게 된 새로운 세상 앞에서 비행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항 면세점- 화려한 조명, 멋지게 진열된 상품들, 오고 싶다고 맘대로 올수 없는 곳, 시중가보다 내 돈을 덜 주고 살 수 있다는 매력, 그리고 해박한 상품지식을 갖춘 면세점 직원들. 처음 만난 면세점은 신세계였다. 며칠 전 20년 넘게 면세점에서 근무하고 함양으로 귀촌하신 분이 피아노를 배우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이는 60대. 여기까지 듣고 꼭 한번 주간함양 지면에 이분을 소개하고 싶어졌다. 거절당하더라도 한번 부딪혀 보자는 마음으로 전화를 했고 감사하게도 인터뷰 허락을 받았다. 이순의 나이에 피아노를 배우고 치신다니! 좋은 취미생활을 하고 계신 분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설레고 떨렸다. 가르쳐 주신 주소로 찾아가는데 ‘내비게이션이 잘못 안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조급증마저 들었다. 유림면 화장산이 포근하게 감싸 안은 곳에서 즐겁게 전원의 삶을 살고 계신 맹금복 여사. 그녀의 마당에 들어섰을 때 청아한 가야금 연주 소리가 들렸다. 피아노 연주에 가야금까지, 대단한 고수를 만나게 되다니 나는 복도 많아! 짧은 커트 머리에 나이보다 더 어려보이시는 여사님과 인사를 하고 첫 만남을 가졌다. 피아노를 어떻게 배우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첫 질문의 물꼬를 텄다. “아이들이 피아노 학원 다닐 때 저도 같이 아이들과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되었어요. 부산 살 때 직장과 살림을 병행하며 피아노를 배웠지요. 체르니 15까지 배우다 그만 두었지만요. 벌써 그게 20년도 더 지난 일이랍니다” 피아노 1도 모르는 나로서는 체르니 15까지를 배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라서 원고를 쓰면서 그녀를 가르치시는 피아노 선생님께 추가 설명을 들었다. 보통 일반인이 체르니 15까지 배우려면 4~5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셨다. 그리고 체르니 중에서도 13에서 17까지가 난이도가 있는 부분이라고 설명을 해주셨다. 좋아하지 않으면 긴 시간을 배울 수 없는 게 피아노라고 명쾌한 답을 주시기도 했다. 내가 그동안 찾던 고수가 틀림없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고 남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나는 ‘고수’라고 정했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하루를 시작한다. 상상만 해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림이 그려진다. 부산에서 살다가 함양으로 귀촌하게 된 건 건강이 좋지 않아서였다. “살림과 육아를 도와주시던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많이 아팠어요. 병원 가도 정확한 원인을 못 찾았어요. 그때 시골행을 결정했지요” 함양 와서 다시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다소 힘들었다. 너무 오랫동안 피아노 치는 걸 쉬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예전의 실력을 만났다. 귀촌 후 아파트에 살았는데 피아노를 맘껏 치고 싶어서 땅을 구입하고 현재의 자리에 집을 지으셨다. “요즘도 1주일에 3일은 피아노학원에서 배우고 있어요. 피아노는 배워도 배워도 어려워요” 수줍게 웃는 그녀의 미소를 보며 책에서 만났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생각났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6시간씩 첼로 연습을 했던 카잘스는 그렇게 매일 6시간 연습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 기자에게 ‘실력이 조금씩 향상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취미로 하는 거지만 꾸준하게 연습한다는 그녀의 말이 위대한 첼리스트의 말과 같은 줄기의 말임을 나는 안다. 열정 많은 그녀는 피아노뿐 아니라 함양문화원에서 가야금, 장구도 배우신다. “코로나19가 오기 전에는 제가 배운 걸로 봉사활동도 많이 다녔어요.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들을 뵈면 친정엄마도 생각나고 맘이 푸근해져요. 지금은 봉사활동을 못하고 있으니 그게 너무 안타깝네요” 그녀가 봉사활동을 빨리 시작할 수 있도록 코로나바이러스 치료제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피아노를 치면 어떤 게 좋은가요?” 함께 있는 시간 편안함을 주는 그녀에게 물었다. “피아노를 치면서 내 안의 분노와 화가 많이 없어졌어요. 예전에 울컥했던 일들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있죠. 음악으로 내면을 채우다 보니 여유가 생겼고 제가 달라진거죠” 그녀에게서 느껴졌던 여유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엄마가 지금도 피아노 친다는 걸 알게 된 딸도 직장 다니면서 취미로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누구를 만나든지 자녀교육의 팁을 알고 싶어 하는 내게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키울 때를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 아이들 어릴 땐 책을 많이 읽었어요. 우리 집에 책을 판매하는 분들이 오면 우리 아이들이 그냥 안 보냈으니까. 그때는 계몽사,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많이 읽었어요. 아이들이 책을 많이 읽으니 어휘력이 좋아지고 시험 칠 때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때 저도 아이들과 같이 책을 많이 읽었죠. 지금은 많이 못 읽고 있지만...” 피아노를 배울 때도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을 때도 아이들과 함께, 아이들과 많은 것을 함께 해서 추억도 많은, 그래서 더 부러웠다. 처음 그녀를 만날 때의 떨림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큰언니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편안했다.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피아노 연습의 시간이 다가와서 아쉽고 감사한 마음으로 화장산 자락을 떠나왔다. 다시 가고 싶다. 다시 만나고 싶다. 음악은 상처 난 마음에 대한 약이다. - 알프레드 윌리암 헌트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