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산맥 오지를 배경으로 하여 아주 소박한 삶의 풍경들을 담은 사진을 접한 적이 있다. 그 안엔 작은 집들이 이웃하여 있고 작은 문간들에는 어린 자녀들과 함께 서있는 순박한 촌 사람들의 얼굴들이 있었다. 사진을 찍던 그날에도 그들은 여느 때처럼 하루의 일상들이 있었을 것이며 카메라에게 아주 잠깐 자신들의 모습을 내어주는 것이 그나마 일상을 깨어지는 일이었을 게다. 사진 속에 기록된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도 기대도 열정도… 울음도 체념도 절망도 없는… ‘그저 그렇게 살고 있음’이 있었다. 이를 굳이 언어로 형용한다면, 오랜 세월 베어 있는, 그래서 낯설 것 없는 일상의 ‘단순한 평화로움’...
물론 그러한 ‘단순한 평화로움’은 문명에서 떨어져 사는 오지 사람들의 삶에서만 엿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목적들을 향하여 다양한 바쁨들로 얼기설기 얽혀 있는 우리 문명인들의 복잡한 일상의 와중에도 ‘단순한 평화로움’은 우리네 시간들의 사이 속, 공간들의 사이 속에 늘 살포시 놓여 있다. 그것은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무언가로 고요함을 지키면서 늘 여기 혹은 거기에 있다. 우리가 우리의 바쁨들을 내려놓는 찰나에만 맛볼 수 있을 시간의 미소 그리고 공간의 미소로.
코비드19로 인해 인간 의식의 지면 위로 떠오른 불확실성들 앞에서 우리 마음은 또다시 우왕좌왕하면서 우리의 영구적인 생존에 대해 낯설지 않은 구설들로 염려들이 많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약 300만년쯤으로 추정되는 인류조상의 기원부터 지금의 현생 인류까지 확실성을 경험한 시대는 단 한번도 없지 않은가? 즉 우리 인간의식은 조상의 조상때부터 지금까지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들의 조합인 불확실한 오늘만을 경험해 오지 않았는가?어제로부터 물려받은 오늘과 내일의 불확실성에 대해 우리가 그간 안일해져 있었을 뿐이지, 사실 코비드 19와 같은 사건들은 무수히 여러 번 우리들에게 찾아와 불확실성의 오늘을 일깨우곤 했었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오늘과 내일의 불확실성을 이번에는 이왕 명확하게 직면하면서, 부디 우리가 우리의 바쁜 질주를 멈추는 용단을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왕좌왕의 혼돈에 빠지는 대신, 바쁘게만 가동시켜 왔던 현대 문명인들의 거대한 시간 기계를 멈추었으면 좋겠다. 더 빨리 빨리 움직여서 먹고 살 물자들을 더 많이많이 축적해야 한다는 현대 문명인들의 특유한 강박관념을 멈추었으면 좋겠다. 그 멈춤을 통해서 덜 움직이고 천천히 가도 세상의 먹을거리와 삶의 재료들을 협력하여 잘 운용하기만 하면 충만하고 행복한 오늘과 내일을 만들 수 있다는 지혜와 여유를 되찾았으면 좋겠다.
삶의 외연들에 가득 차 있는 모든 잠재성과 모든 가능성은 사실 우리 삶의 불확실성이 내어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우리가 마음만 바꾸어 방향을 재설정하기만 하면 또 다른 잠재 가능성-질주하는 시간과 시간, 그 사이에 숨어있는 ‘단순한 평화로움’을 꺼내 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는 오랫동안 질주하던 낡은 시간의 기계를 잠시 멈춘 후 그 위에 ‘단순한 평화로움’을 걸쳐 놓아 시간마저 아주 천천히 가도록...
그래서 우리의 삶에 쉼표( , )의 길이가 여유롭게 늘어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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