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거창에 있는 축협에서 일을 하게 됐다. 8월1일 첫 출근하여 일을 하면서도 월급이 얼마인지 몰랐다. 거창 장날이던 16일 땀범벅이 되도록 바깥일을 하고 돌아오니 노란봉투가 쥐어졌다. 첫 월급봉투에는 1000원짜리 39장이 들어 있었다. 자장면은 150원, 소고기 한 근은 500원이던 시절이다. 월급봉투를 받아들고 시장에 가서 부모님 내복과 소고기 한 근을 샀다. 오늘 꼭 월급봉투를 어머니께 가져다 드려야겠다는 마음에 거창터미널로 향했다. 부모님은 지곡면 덕암마을에 살고 계셨다. 안의로 가는 버스는 탔지만 도착하니 지곡 가는 막차가 끊겼다. 종이에 둘둘 말린 소고기를 들고 안의에서 지곡까지 걸었다. 늦은 시간 대문을 들어선 아들을 보고 놀란 것도 잠시, 월급봉투와 선물을 내미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식은 보리밥으로 상을 차렸다.잠자리에 누우니 내일 출근이 걱정이 되었다. 아침에 첫차를 타고 가면 지각이다. 잠시 눈을 부치고 일어나 운동화 끈을 동여맸다. 그리곤 거창을 향해 달렸다. 밤공기는 싸늘했고 안의를 거쳐 바래기재에 도달하니 먼동이 텄다. 곧 출근이니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여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고 시계를 보니 오전7시. 그 일이 있은 후 일주일 뒤 발톱이 빠졌다. 42년 세월을 축산인으로 살아온 양기한씨는 이렇게 축협에 발을 디뎠다. 20년은 직원으로, 20년은 관리자로, 나머지 2년은 축협조합장으로 일한 양기한씨는 지금도 ‘뼛속까지 축산인’으로 살고 있다. 특히 유능한 인공수정사로 일한 이력은 지금도 그의 생활을 바쁘게 한다. 1982년 그는 실력 있는 수정사 전입 요청으로 부산우유협동조합으로 이동했다. 여기는 실력이 없으면 한 달도 못 버티는 곳으로 이 분야에서는 대한민국 어디에 내 놔도 인정받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단칸셋방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는 1995년까지 일한 후 상무시험에 합격하여 관리자가 되어 함양으로 돌아왔다. 인공수정기술자가 아니라 관리자가 된 양기한씨는 축협 전반을 보는 넓은 시야를 갖게 됐다. 인공수정사이던 때는 나무만 보았으나 관리자가 되고 나니 숲을 보는 혜안을 가져야 했다. 축산업이 어려움을 겪던 시절에는 한우도 품질을 높이면 수입소고기와 차별화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전국에서 으뜸가는 한우에 함양이 이름을 올릴 수 있도록 백방으로 쫓아다녔다. 인공수정사인 양기한씨는 한우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종자개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랬기에 조합장 재임당시 금송아지프로젝트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우수한 수소의 형질을 인공수정을 통해 암소에 이식해 금송아지를 낳는 것. 소 한 마리 시술에만 50여만원의 비용이 들었지만 도·군비 지원으로 농가에서는 5만원의 자부담으로 가능하게 했다. 함양에서수정란 이식으로 연간 60~70두 송아지가 태어난다고 하니 앞으로 함양 한우산업을 이끌어 갈 자산이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열정을 다해 조합장의 위치에서 책임을 다했던 양기한씨의 지금은 재물없이도 선행을 베푼다는 무재칠시(無財七施)를 실천하는 시간이다. 그는 “돌고 돌아 스무 살의 나로 돌아온 것 같다. 용서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무재칠시를 행해야 진정한 행복이 찾아온다고 생각한다”며 “예쁜 벚꽃보다 고운 단풍이 낫다고 생각하며 삶을 회고하는 때이다”고 전했다. 가축을 돌보고 인공수정사로 활동하지만 그에게 숙제가 남았다면 후배들의 생각을 이끌고 농협조직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록을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서랍 속에 숨겨져 아직 읽히지 않았다는 그의 퇴임사가 책으로 펴낸 그의 글로 세상 밖으로 나오길 기대한다. 축협이 농협으로 합병된 이후 농협배지를 단 한 번도 달지 않은 채 ‘차마 꿈엔들 잊힐리요’라는 메시지로 축협을 사랑하고 발전을 기원하는 양기한씨의 하루는 축산인으로 시작해 축산인으로 마무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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