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몸 지탱하려고(病骨欲支撑)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暫借蒲團宿)소나무 물결 달빛 아래 들끓으니(松濤沸明月)구곡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誤擬遊句曲)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浮雲復何意)한밤중 산 골짜기 닫혀있구나(夜半閉巖谷)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唯將正直心)혹시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倘得山靈錄)1472년 음력 8월 추석을 전후해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선생이 함양군수 재임 당시 지리산을 유람하며 첫날 밤을 보낸 고열암에서 지은 숙고열암(宿古涅庵)이라는 시(詩)다. 548년 전 지리산에 오른 점필재 선생의 감동과 감성이 오롯이 전해지는 듯하다.장대 같은 장맛비와 어둠을 뚫고7월3일 오후 8시 하루일과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부산을 출발했다. 사림파의 영수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걸었던 지리산 길 탐방을 위해 장맛비를 뚫고 승용차로 3시간을 넘게 달려 숙소가 마련된 경남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 느티나무산장에 도착했다.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백무동 지리산 자락은 이미 칠흑같은 어둠의 한복판을 향해 가고 있다. 다행히 장대비는 잦아들었다. 백무동은 김종직 함양군수 일행이 1472년 함양관아를 출발해 엄천을 건너 적조암에서 천왕봉에 올라 백무동으로 내려왔던 지리산 유람 4박5일의 마지막 종착지다.숙소는 함양서복연구회(이하 함양서복회) 문호성 회장이 다른 지역에서 오는 일행을 위해 자신이 운영하는 산장을 제공했다. 먼저 도착한 지리산역사문화연구단(이하 지리산역사연구단) 활동가 3명과 문호성 회장, 강재두 함양서복회 부회장 등 다섯 명이 밤늦게 도착한 필자 부부를 반갑게 맞아 준다. 허상옥 서복회 사무국장이 막 자리를 떠난 뒤였다. 강 부회장의 소개로 지리산연구단 활동가들과 인사를 나눴다. 여장을 풀 여가도 없이 이들 일행과 합류했다. 약주를 곁들인 자리는 점필재 선생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유두류록(遊頭流錄)과 다음날 탐방코스에 대한 이야기로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른다. 지리산역사연구단 활동가들의 열정과 내공이 느껴진다. 비록 타향살이를 하고 있지만 함양에서 나고 자란 함양인으로서 함양군수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 선생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생각에 부끄러움마저 들었다.점필재에 빠진 지리산역사문화연구단이번 탐방에 참여한 지리산역사연구단 활동가 3명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함양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분들이다.지리산권 마실 협동조합 조용섭 이사장은 부산 출신으로 부산은행을 정년퇴직하고 서울에서 살다가 몇해 전 남원에 터를 잡았다. 협동조합 이사장을 맡아 인문학 강연과 지리산권 문화기획 및 답사, 콘텐츠 개발, 문화관광 네트워크 구축 등에 대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 이사장은 남원 ‘이순신 백의종군 길’을 발굴해 개척한 주역이기도 하다. 대전제일고 한문교사로 재직 중인 이영규 선생님은 충청도가 고향이다. 이 선생님은 점필재의 빼어난 문장이 함축된 김종직 선생의 시(詩)에 매료돼 김종직에 빠졌다. <유두류록>을 수백 번 읽고 지리산 ‘김종직 길’을 150여 차례 답사한 김종직 마니아다. 유두류록 원문을 근거로 새로운 김종직 길을 찾고 점필재가 머물렀던 절터와 명소 등에 대한 좌표를 수정하기도 한다. 이번 탐방에서 가이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지리산 산악구조대장으로 통하는 민병태 대장은 산청 분이다. 30여년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산청분소에서 근무하면서 지리산에 얽힌 역사와 문화유산 발굴을 위해 연구하고 지역민들을 상대로 수많은 구술을 채록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각 분야 전문가들과 공유하면서 다방면에서 해박한 지식을 축적해온 ‘지리산 박사’다. 이것은 필자가 붙인 별명이다.느티나무산장의 밤은 깊어만 가고밤을 지새울 듯 이어진 담소는 이미 탐방일인 4일 새벽 1시가 넘어서야 매조지었다. 기상시간은 6시30분이다. 늦잠을 자면 민폐라는 생각에 휴대폰 알람을 맞춰 머리맡에 두었다. 산장 통유리 너머로 들려오는 백무동 계곡물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오전 6시다. 늦잠에 대한 걱정은 기우였다. “역사적인 길 탐방에 동행하고 싶다”며 먼 길을 따라나선 필자의 아내도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가 지나서인지 잔뜩 찌푸린 날씨지만 날은 훤하게 밝아 있다. 통유리 넘어 지리산의 녹음이 한 폭의 그림이다. 작은 창문 한쪽을 열었다. 세찬 계곡물 소리와 청량한 지리산 아침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산장지기 사모님의 손맛을 더한 자연산 산나물 반찬과 들깨시락국으로 정갈한 아침상이 차려졌다.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 쌉싸름한 산나물과 참기름인지 들기름인지 모를 고소한 향이 절묘한 조화다. 입은 당연히 호사다.운서리 적조암서 점필재 흔적 쫓아 첫발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지리산역사연구회 회원들과 차로 15분 정도 달려 1차 집결지인 지리산둘레길 함양안내센터(옛 의탄초등학교)에 도착했다. 7시30분이 조금 넘긴 시간인데 다른 일행은 벌써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함양서복회에서는 문호성 회장과 김윤세(인산가 회장) 고문 부부, 강재두 부회장이 참여했고 허상옥 사무국장은 다른 일정으로 출발과 복귀시점에만 함께 했다. 앞서 소개한 지리산역사연구단 3명과 필자 부부, 안전한 탐방을 위해 지원 나온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이상운 씨까지 모두 10명으로 김종직 길 공동탐방단이 꾸려졌다. 이날 공동탐방은 함양서복회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둘레길 함양센터에서 휴천면 운서리 적조암까지는 승용차로 이동했다. 엄천강과 구시락재를 지나 오전 8시쯤 적조암에 도착했다. 잔뜩 찌푸린 날씨지만 새벽까지 간간이 내리던 비는 다행히 그쳤다. 공단 소속 이상운 씨가 선두를 맡았다. 후미는 산악구조 베테랑 민병태 대장이 시종일관 책임졌다. 이영규 선생님은 중간에 자리해 그동안 수없이 김종직 길을 답사하며 발굴하고 연구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수백 년 된 돌배나무 천연기념물급 ‘자태’첫번째 답사지는 지장사터다. 적조암에서 출발해 얼마 지나지 않아 출입금지 안내판이 서 있다. 여기서부터 국립공원지역임을 알리는 표지판이기도 하다. 일반에 개방되지 않은 비법정탐방로지만 울창한 천연 숲과 산죽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다. 김종직 길 초입에 해당하는 이 곳은 여기저기 산죽군락이 차지하고 있지만 산길 치고는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1시간쯤 올라가니 수령이 수백 년은 되었음직한 돌배나무가 500여년 전 김종직 일행이 이곳을 지나 천왕봉을 유람한 사실을 말해주듯 떡하니 서 있다. 선두 그룹에서 “와!, 우~와!”하는 탄성이 터진다. 무슨 일인가 싶어 걸음을 재촉한다. 눈대중으로 봐도 키(수고)가 족히 20m는 넘어 보인다. 둥치는 어른 세 사람이 손을 뻗어야 닿을 수 있을 정도다. 천연기념물급 자태다. 200m쯤 더 올라가니 수령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큰 아름드리 산뽕나무가 사방으로 가지를 펼치고 있다. 노구(老軀)에 의지해 듬성듬성 매달린 오디가 익어가고 있다.말에서 내려 짚신으로 갈아 신다적조암을 출발한지 1시간 10분이 지났다. 제법 넓은 터가 눈에 들어온다. 지장사 갈림길이다. 이영규 선생님은 “당시 이 곳은 말을 묶어 두던 마구간으로 주차장이었던 셈이다”라고 설명했다. “몇해전 일부 선답자들은 점필재 일행이 의탄에서 고열암 쪽으로 올랐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엄천~거머리재~적조암(3.58km)을 거쳐 지장사 갈림길에서 말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올랐다는 것이 유두류록에 기록돼 있다”고 했다.탐방단은 지장사 여객(객주)터를 지나 지장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절터를 둘러본 뒤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와 고열암(1.13km)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 길은 제법 가파르다. 계속 오르막길이다. 가슴 높이 정도였던 산죽도 일행의 키를 훌쩍 넘는 곳이 많아졌다. 잠시 딴청을 피우다간 길을 잃기 십상이다. <다음주에 계속>정세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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