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기해대운己亥大運(21세~30세)에는 연세대학교 사회복지학과(1985~1989) 1학년 때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압구정동 호프집을 한 달 만에 인수하면서 처음으로 요식업에 뛰어든다. 화火가 강한 병화일간丙火日干, 낮 시간의 태양답게 치킨 배달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던 그 당시 근처에 아파트 단지가 있었는데, 주변에 치킨 가게가 없으니 배달이나 포장 판매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주인 할머니에게 권유를 했지만 할머니는 썩 내키지 않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주인 할머니를 설득해서 본인이 직접 핸드메이드 전단지를 만들고, 경비가 삼엄한 아파트에 어렵게 전단지를 돌릴 수 있게 허락을 받아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전단지를 돌리고 돌아오자마자 바로 전화가 오기 시작하는데, 그렇게나 반응이 빠르게 올 줄 몰랐고 배달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상황이라 곧바로 배달을 시작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때 백종원씨는 처음으로 장사의 맛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다 얼마 안가서 치킨 배달은 대박이 나고 일이 너무 많아져 치킨을 튀기는 기계를 5대까지 늘렸지만 할머니가 병을 얻고 가게를 내놓기로 결정했고, 이것을 아쉽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가게를 직접 하지 않겠냐고 할머니가 먼저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통장에 모은 돈으로는 가게를 인수하기 힘들다고 이야기하자 할머니가 “지금 가진 것만이라도 가져오면 내주겠다. 너는 갚을 수 있을 것 같다”며 가게를 백종원씨에게 넘기게 되고 처음으로 가게의 사장이 된다.
그렇게 잔금을 모두 갚으면서 가게를 완전히 인수한 이후 3년간 가게 3개를 운영하며 15억 원대의 자산가가 되었다. 그러다가 그렇게 모은 자산으로 나이트클럽을 인수하려던 것을 알게 된 가족이 기겁을 하고 반대를 하는 바람에 학사장교로 지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공직에 종사하는 집안에서 물장사를 한다고 했으니 당연히 반대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수한 나이트클럽을 헐값에 넘기고 그 돈을 주식에 투자했으나, 부도가 나버렸다고 한다.
사주 원국과 대운, 그리고 세운에서 들어오는 글자로 의해 완전한 인신사해寅申巳亥가 되는 1989년, 쫓기듯 육군 학사 14기로 들어가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하고 난 이후에 육군 제7포병여단에서 포병장교로 복무하게 된다. 리얼 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 ‘해군 제2함대 사령부’ 편에서 요리대회 심사를 맡았을 때 밝힌 바에 따르면, 포병 관측장교로 복무하던 시절 부대 BOQ에 올라오는 짬밥이 하도 입에 안 맞아 내가 해도 이것보단 잘 하겠다고 판단하고 그냥 취사반 일을 했다고 한다. 이때 장교가 자기 임무를 팽개치고 취사반이나 기웃거린다고 참모 장교한테 불려가서 혼나기도 했지만, 식당을 기습 시찰한 여단장이 밥맛을 보고는 보직을 취사장교로 정식으로 인정해버리면서 백종원씨는 장교 출신자 중에서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보직인 ‘급양과장’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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