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절반을 보내고 다시 절반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보리를 추수하고, 감자를 캐고, 양파를 뽑고, 늦은 모내기까지 마쳐 놓고 나서 농부는 모처럼의 여유를 갖는 시간이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김장 배추 모종을 내기도 한다. 커다란 양은솥에선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파란 하늘을 향해서 꺽다리처럼 자란 옥수수 대에서 따온 옥수수가 얼기설기 수염을 단 채로 양은솥에서 단내를 풍기는 것이다. 길가에서 파는 옥수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찰지고 깊은 단맛이 입안을 감돈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때 이른 장마 소식에 마음이 눅눅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7월 초순의 태양은 숲을 더욱 짙게 만드느라 땀을 뻘뻘 흘린다. 강릉에서는 며칠 전에 하루 동안 220.2㎜의 비가 내려서 1911년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후로 하루 강수량으로는 최고 강수량을 보였다는데, 지리산은 꿈쩍도 하지 않고 점잖게 앉아있다. 한해 농사를 다 마쳐놓고 함포고복(含哺鼓腹)하며 떡을 만들어서 이웃과 나누던 우리 민족의 여유가 칠월 초순에도 잠깐 찾아온다. 맥추감사절이라는 절기가 바로 그것이다. 글자 그대로 보면, 보리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인데, 보리농사를 짓지 않는 요즘에는 그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것 같아 아쉽다. 한해의 절반을 살아온 우리로서는 마땅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가을걷이를 마친 후에 찾아오는 추수감사절이 감사의 절정이라면, 한해의 절반을 살고 새로운 절반을 시작하는 시점에서의 맥추감사절은 ‘절반의 감사’라는 의미만으로도 빼놓을 수 없는 절기이다. 연초부터 시작된 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염병 경보 단계 중 최고 위험 등급인 6단계를 선포하면서 ‘팬데믹(감염병 세계 유행)’이라는 낯선 단어가 일상이 되고 말았다. 경제는 위축되었고, 기업들은 줄줄이 도산되면서 실업율의 증가와 마이너스 경제성장으로 일컬어지는 경제위기를 맞았다. 이와 맞물려 미국에서는 일부 경찰들의 인종차별적인 대처로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야말로 지구촌은 혼란과 혼동의 시대를 맞았다. 이런 와중에 감사라는 말이 쉽게 나올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긴 하다. 그러나 쇠가 연단을 받으면 더 단단해지는 법이다. 지금도 어려움을 딛고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나눔을 실천하면서 기부천사로 칭송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먹잇감을 가지고 싸우는 짐승처럼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우리 민족은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미풍양속을 가지고 있다. 개인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의 실천 등으로 성공적인 코로나19 방역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세계 각국에 이미 수백만 장의 마스크를 무상으로 전달한 바 있다. 이런 일들은 높은 국민소득을 자랑하는 나라들이라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최소한의 양심과 배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국민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뇌출혈로 쓰러져서 의식 없이 벌써 3년째 누워있는 아내의 얼굴을 본 지도 5개월이 넘었다. 다행히 유리벽 너머로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면회를 허가한다는 병원의 연락을 받고 면회를 예약했다. 많은 보호자들이 면회를 신청한 탓에 다음 주 수요일에 면회 날짜가 잡히긴 했지만,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성도들에게 감사를 설교해야 하는 목사로서 불평과 원망과 짜증은 가당치도 않은 얘기다. 필자 뿐 아니라,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힘든 일을 안고 간다. 큰 감사는 그만 두고라도 절반의 감사를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도 그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빗속에 쓰러져있던 달맞이꽃을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해가 들면서 허리를 펴고 일어나더니 환하게 웃음을 보였다. 남들은 달맞이꽃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날맞이꽃이라고 부른다. 언제나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날맞이꽃은 세상을 사는 감사의 마음을 가르쳐준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설교를 남겼다. “별빛에 감사하는 자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에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에 감사하는 자에게는 영원히 지지 않는 은혜의 빛을 주신다” 정말 공감이 되는 말씀이다. 많은 감사는 작은 감사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작은 감사들은 큰 기적들을 보게 한다. 그래서 절반의 감사가 갖는 의미는 무시할 수 없다. 63년 베이비부머 세대로 태어난 필자는 그럭저럭 절반의 인생을 살았다. 나머지 절반의 삶을 앞두고 나는 어떤 감사를 해야 할까? 이달에 태어날 손주도 감사하고, 작년 5월에 낙상하셔서 인공고관절 수술을 하신 후에 회복 중이신 어머니를 모시게 된 것도 감사하고, 몇 안 되는 성도들을 모시고 20년 가까이 행복하게 목회하고 있는 것도 감사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감사의 조건들을 꼽아 보면서 오늘 하루는 100가지 감사를 찾아서 적어보기로 했다. 100가지 감사의 목록들이 다 정리되고 나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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