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상림의 숲속에는 다양한 종류의 조형물이 있다. 이 속에는 문화재도 있고 기념비나 상징물도 있다. 과시나 편의성을 위한 조형물도 있다. 이들을 시대순으로 살펴보면, 사운정 1906년, 초선정 조선 고종 때, 함화루와 최치원 선생 신도비 1923년, 함양이은리석불 1950년대, 화수정 1972년, 권석도 의병장 동상 1991년, 역사인물공원 2001년 등이다. 모두 20세기 이후 숲에 나타난 변화의 흔적이다. 그 전에는 자연 그대로의 온전한 마을숲이었다. 최치원 선생께서 숲을 가꾸고 나서 고려와 조선 시대를 잇는 동안 계속 그래왔다. 20세기 들어 자리를 차지한 이 조형물들은 어떤 것이며 천연의 숲에 들어오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정보가 많지 않지만, 하나하나 알 수 있는 만큼은 살펴보자. 함양상림에서 대표적인 정자와 누각은 함화루, 사운정, 초선정이 있다. 이들 정자와 누각들은 상림의 숲에서 선비문화를 즐기는 하나의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각각의 고유한 기능과 조성 배경은 전혀 다르다. 함화루는 조선 시대 함양읍성의 남문이었다. 2층의 고풍스런 누각으로 되어있다. ‘멀리 지리산을 바라본다’ 하여 망악루(望岳樓)라 부르다가 뒤에 함화루(咸化樓)가 되었다. 그 옛날 함양읍을 다녀간 관리와 문사들이 이 누각에 올라 지리산의 장구한 기상을 그렸을 터이다. 사운정(思雲亭)은 천년숲을 일군 ‘고운(孤雲) 선생을 추모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사람들이 붐비는 상림 숲의 중심부에 있다. 뒤쪽으로 최치원 선생 신도비가 있고 서쪽 곁에는 상림우물과 중앙숲길이 이어진다. 동쪽 곁에는 아담한 연못이 있다. 사운정이 이곳에 들어서게 된 배경은 첫째 숲의 가운데쯤이고, 둘째 상림우물이 가까이 있어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바로 뒤 곁에 최치원 선생 신도비가 들어서면서 이 주변은 상림의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초선정(19인정)은 지곡면에 있는 19인의 선비들이 모여 교류하고 단합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상림운동장 남쪽에 있었지만, 지금은 개평마을로 옮겨가고 없다. 초선정은 조선 고종 때 지었다고 한다. 고종의 임기가 1907년까지이니 사운정이 들어설 무렵에 이 정자도 함께 들어서지 않았을까 싶다. 초기에 숲에 들어온 일반적인 정자다. 지역 유림들의 힘을 실감한다. 함양척화비는 상림운동장 남쪽 입구에 세워져 있다. 잘 알려진 대로 흥선대원군의 쇄국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전국의 척화비를 거의 없앴다고 하지만 함양척화비는 원형이 깨끗하게 남아있다. 쓰러진 것을 찾아서 이곳에 세웠다고 하니 일제강점기에 역시 뽑아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척화비는 처음부터 상림 근처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크다. 예전에 관리들의 선정비를 세워둔 비석거리가 바로 곁에 있었다. 그만큼 상징성을 지닌 장소이기도 하고 이곳이 숲으로 들어오는 길목이기도 했다. 사운정 앞 숲속에는 3기의 비문이 나란히 서 있다. 항일운동 기념비이다. 이 기념비는 1919년 3·1 독립운동 때 함양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군민들의 항일정신을 담고 있다. 함양이은리석불은 고려 시대에 만든 앉아있는 돌부처이다. 1950년 무렵 함양 이은리의 냇가에서 출토된 것을 상림우물 남쪽의 숲속에 옮겨놓았다. 이 부처상에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며 기도를 한다. 20세기 이전 함양상림에 어떤 조형물도 들이지 않은 까닭이 있을까 궁금하다. 숲의 신성성을 지키려는 오래된 의미가 있었을까? 구전되고 있는 숲의 전설을 보더라도 최치원 선생의 신성과 영웅성은 독보적이다. 이외에도 어떤 까닭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사운정과 초선정은 일제강점기 이전에 들어섰고, 함화루, 최치원 선생 신도비는 강점기에 들어섰다. 제일 먼저 들어선 기념물은 사운정으로 보인다. 사운정보다 먼저 초선정이 들어서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맨 먼저 숲에 들어오는 것은 중요성을 지닌다. 커다란 의미와 명분이 있어야 한다. 이때 여론이 이렇게 좋은 숲에 정자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지 모른다. 거기 더해서 최치원 선생을 기리는 정자라면 반대할 명분도 약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최치원 선생 신도비는 당연히 숲에 있어야 한다. 후손들이 신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선비들이 풍류를 읊는 초선정도 들어왔으니 그다음부터는 쉬워진다. 문화재급 건축물인 함화루는 상림운동장의 넓은 공간에 들여놓기 제격이다. 상림운동장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함화루를 상림으로 옮길 1923년 당시에는 상림운동장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전에는 기원, 제의, 비보 등 상징적 의미의 역할이나 실용적 필요에 따라서 마을 어귀나 숲쟁이 등 그 장소에 어울리는 인공의 구조물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마을숲 안에 어떤 구조물도 거의 세우지 않았다. 20세기 이후 상림 숲에 조형물을 들여놓은 것은 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과욕이 아니었을까. 이런 활동이 서구 문명의 유입과 관련 있는지 알아볼 필요도 있겠다. 일제 강점과 해방, 산업화 시기를 지나오며 우리의 전통문화는 많은 굴곡을 겪었다. 그 당시 현대사회로의 변화 과정과 사회 지도층의 의식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면 궁금증이 조금 풀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함양상림의 문화유적과 조형물들은 이제 품고 가야 할 숲의 일부가 되었다. 이들은 현대사회를 거치며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상림의 숲속에 풀어놓기도 하였다. 그래서 상림의 숲에는 더욱 많은 이야기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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