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비유의 말씀 중에 달란트 비유가 있다. 주인이 멀리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맡기고 떠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열심히 장사를 했고, 결국 다섯 달란트의 이익을 더 남겨서 열 달란트를 만들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종도 열심히 장사를 해서 두 달란트를 보태서 네 달란트를 만들었다는데,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즉시 땅에 묻어 두었다가 나중에 주인이 돌아왔을 때에 땅에 묻어 두었던 한 달란트를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 주었다는 얘기다. 문제는 주인의 반응이었다. 집 주인이 각각의 종들에게 각각 달란트를 맡기고 떠난 이유는 자기가 없는 동안에도 자기의 재산이 증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주인의 마음을 헤아린 두 사람은 열심히 장사를 해서 주인의 재산을 증식시켰는데,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혹시라도 장사를 하다가 손해를 보게 되면 받은 한 달란트 마저 까먹게 될까봐 애당초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는 것이다. 그 종의 마음에는 주인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주인은 엄하고 무서운 사람이라서 혹시라도 장사를 한답시고 하다가 가지고 있던 한 달란트 마저 잃어버리게 되면 어쩌나 싶었다는 것이다. 달란트는 수천년 전 유대인들이 무게를 잴 때 쓰던 단위로서 한 달란트는 34.4kg이다. 금으로 따졌을 때 한 달란트의 가치는 어마어마한 것이다. 한 달란트가 결코 적은 재산이 아니라는 얘기다. 아무튼 모든 사람들이 이 비유의 말씀을 읽으면서 일반적으로 두 가지 생각을 한다. 첫 번째 생각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각각의 능력에 맞추어서 일을 맡겨 주신다는 생각이다. 누구나 많은 것을 받고 싶어하지만, 실제로는 각각 다른 사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두 번째 생각은 작은 사명을 우습게 여기고 그마저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판단이라는 관점이다. 거기까지가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근본부터 다르다. 하나님께서 각각의 능력에 따라서 다르게 맡겨 주셨다는 것에 대해서 필자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공평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차별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소 생뚱맞은 생각이지만,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다섯 달란트를 주셨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받은 다섯 달란트를 다 활용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만 챙겨서 쓰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한 달란트만 집어들고 사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달란트라는 말은 소질이나 재능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똑같은 재능들을 주셨을 것이라는 약간의 황당할 수도 있는 주장을 하는 이유가 있다. 필자는 예체능에는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한 번도 그림을 그려 보거나 스포츠를 즐겨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군대에서도 그 흔한 축구도 한 번 안 했었다. 그러다가 마흔 살이 넘어서 우연찮게 축구를 하게 되었는데, 저돌적으로 달리는 내 모습에 나도 놀랐다. 한 번은 가족 모임에서 스크린 야구장에 갔었다. 난생 처음 잡아 본 야구 방망이였는데, 그렇게 공이 잘 맞을지 몰랐다. 몸치라고 생각했었는데, 재능발표회에선 춤도 멋지게 잘 추는 모습에 관객들의 환성이 터져나왔다. 수영을 못하기에 물가엔 얼씬도 못하고 살았는데, 스킨스쿠버를 배우고 난 후부터는 바닷 속을 10여 미터까지 내려가서 마음껏 유영하는 내 자신이 신기하기만 했다. 최근엔 우연찮게 그림을 그려 보면서 또 한 번 놀랐다. 다들 내 그림을 보더니 잘 그린다고 칭찬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하는 말이 ‘참, 재주가 많으십니다. 부럽습니다.’라며 추켜 세운다. 그 후로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나라고 두 달란트나 한 달란트만 받았을까? 내게도 남 모르는 다섯 달란트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열심히 찾아서 써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이 달라 보였다. 색감의 차이나 명암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수채화 붓 끝에 묻어나는 세상이 나도 모르는 꿈길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풍경화를 그릴 땐 그 분의 품에 안겨 보기도 하고, 정물화를 그릴 땐 마음 속 평안과 고요 속애 잠이 들기도 한다. 인물화에선 그 사람의 애틋한 일생을 보듬게 된다. 내가 그려 본 세상 속엔 그렇게 그리움이 묻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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