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맞고 있는 인류의 문명은 실로 놀라울 지경이다. 조그만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혼란에 휩싸이는 상황이긴 하지만 지난 100년 동안 이룩한 인류문명의 발전은 그 이전 수백 만 년의 장구한 시간의 변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문명 발전의 기틀은 20세기 초 현대물리학을 필두로 컴퓨터 기술과 분자생물학 등에서 과학 엘리트들의 눈부신 활약에 의해 세워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은 일반 민중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언어로 지식을 공유하면서 국가나 자본으로부터 엄청난 연구비를 지원받으며 문명 세계를 이끌어온 게 사실이다. 이처럼 20세기 이후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자연을 더 잘 알고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생존마저도 확신할 수 없는 다양한 위기 앞에 서있는 상황이다. 과학을 통해 자연에 대한 앎이 증가할수록 많은 이들과 생명들의 삶은 더 위험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뛰어난 엘리트들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그 앎의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현대과학에서 앎이란 관찰자로서의 인간이 물질적 대상에 대한 측정과 분석을 통해 대상을 파악하고 그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양자역학이 관찰자와 대상의 관계가 이전보다 밀접해진 측면이 있지만 여전히 앎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단지 분석해야 할 대상에 대한 앎이 아니라 삶의 터전 안에서 함께 공존해야 할 대상에 대한 앎이라는 인식론적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고가의 최첨단 실험장비나 수퍼컴퓨터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소수의 과학 엘리트들만이 독점할 수 없다. 위기의 시대에 이러한 앎이야말로 지식을 넘어 삶을 위해 지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분석적 지식을 넘어 위기를 극복할 지혜가 필요하다. 앎의 성격의 전환을 위해서는 새로운 배움이 필요하다. 자연의 일부로 살면서 함께 하는 이웃들과 깊은 소통을 통해 이웃들에 대한 엄청난 지식을 쌓아온 소위 ‘야만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지혜는 엄청나다. 『총,균,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뉴기니 사람들과 33년의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오늘날의 비문명인들은 ‘평균적으로’ 산업 사회의 사람들보다 지적 능력이 더 뛰어날 것”이라 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농업을 연구한 잭 웨더포드는 “초기 농부들이 만들어놓은 다양성이 없었다면 현대과학은 출발할 수 있는 밑천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실제로 오늘날의 많은 과학적 지식의 근본은 과학엘리트가 아닌 문명과 거리가 멀었던 ‘야만인’들의 지혜에서 유래했다. 많은 원시 부족들은 자연 속에서 동물적 본능만으로 무지하게 산 것이 아니라 대상을 자신의 일부로 여기면서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수준 높고 깊이 있는 앎을 축적했다. 그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수많은 별이 뜨고 지는 위치를 정확히 기억함으로써 한 치의 오차 없이 방향을 찾았고 사냥에 있어 동물을 추적하기 위해 많은 동물 종들의 행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꿰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흔적만으로 동물의 성별, 나이 등을 ‘추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앎을 넘겨받은 과학 엘리트들은 그 속에 담긴 정신을 함께 가져오지 못했다. 21세기 문명사회를 이끈 사람들의 앎만으로 대재앙을 막아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지금의 과학적 지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잊혀진 지혜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땅을 팔라고 위협하는 워싱턴 대추장의 편지에 답하는 시애틀 추장의 연설 속에서 우리는 그 답이 있음을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대지의 한 부분이고 대지는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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