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공원은 함양상림에서 상징과 의미의 공간이 되었다. 그 속에는 특별한 인물과 기막힌 사연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나라와 고을을 빛낸 함양의 인물 흉상과 함양군을 거쳐 간 역대관리들의 선정비와 시대상을 알리는 열녀비가 있다. 2001년 새로운 천년을 열어가는 기념사업으로 함양군에서 만들었다. 숲의 서쪽 끝자락을 물고 있는 이 터는 그 전까지 지역 문중의 땅이었다고 한다. 농경지로 활용하던 것을 함양군에서 흡수했다. 함양을 빛낸 역사 인물은 최치원·조승숙·김종직·양관·유호인·정여창·노진·강익·박지원·이병헌·문태서이다. 이 중에서도 박지원·유호인·문태서 세 분의 업적과 성향을 살펴보려 한다. 박지원은 안의 현감을 지낸 천재적인 사상가이자 타고난 집시(방랑자)다. 조선 후기를 살았지만, 그 당시 제도와 사상의 틀 바깥에 있었다. 소통의 달인이었고 뛰어난 해학을 지닌 이야기꾼이었다. 양반 천민을 가리지 않고 대화가 되는 친구를 폭넓게 사귀었다.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던 청나라에 다녀와 철학과 해학이 담긴 기상천외한 여행기를 썼다. 그 유명한 『열하일기』다. 성리학이라는 단단한 이념의 벽 앞에서 경박한 소설적 장르를 열었다. 한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일으킨 문체반정이다. 정조가 직접 나섰으니 어마어마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 재야를 떠돌던 선생은 쉰이 넘어서 안의 현감으로 일하게 되었다. 드디어 해박한 지식과 신문물을 실생활에 활용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때 북학운동을 농경 생활에 실천했다. 최초로 벽돌 건물을 지었고 수차·베틀·풍구·물레방아를 만들었다. 물레방아골이라는 이름은 그래서 탄생하게 되었다. 선생이 안의 현감을 그만두자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께서는 감영에 고발하여 주모자를 벌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런 인물이 함양을 거쳐 갔다는 사실이 가슴 뿌듯하다. 역사인물공원에 자리 잡은 흉상이 당당하고 자랑스럽다. 유호인은 시와 문장을 잘 지은 천재적인 시인이다. 관직에 오래 있었으나 인품이 맑고 검소해 가난하게 살았다. 선생은 함양상림과 실제 생활에서 인연을 맺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다. 그래서 더 애틋함이 있다. 젊었을 때 죽장마을(옛 이름; 대덕)에서 공부하며 살았다. 그 자리에 깨진 기왓장이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뇌계(위천) 가까운 대덕에 살아서 호를 뇌계(㵢谿)라 하였던 것 같다. 위천과 함양의 경관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서정적이며 내면세계를 관조하는 성품이 엿보인다. 600여 년 전 상림의 숲길을 걷는 선생의 뒷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 길을 우리도 함께 걷고 있다니. 장구한 역사 속 인걸과 만나는 것이 아닌가! 문태서는 서상면에서 태어난 구한말 의병대장이다. 체격이 튼튼하고 날렵하며 의지가 강해 어려서부터 대장 노릇을 했다. 타고난 무인의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스승으로 추정되는 이웃 마을의 이제두로부터 학문과 병서를 익혔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을사5적이 일제에 우리의 외교권을 넘겨준 치욕의 사건이다)이 체결되자 구국 활동의 큰 어른인 최익현을 찾아가 의병활동에 몸담았다. 서상 남덕유산 아래에 있는 원통사에 기지를 두고 활동을 시작했다. 신출귀몰한 활동에 놀란 일본군마저도 덕유산 호랑이라 불렀다. 의병활동 중에 주민들의 재산을 빼앗지 않았다. 오히려 주민들을 위로하고 지켜주어 존경받았다. 2010년 서상면 상남리에 사적 공원이 세워졌다. 마음의 빚을 진 심정으로 사적 공원을 찾았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높은 정신은 덕유산 골짜기에 살았고 역사의 기록에 남았다. 역대관리 선정 비석군은 경상감사와 함양군수를 지낸 조선 시대 지방 수령(관찰사·부사·군수)들이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잘 했다는 징표이다. 서쪽 입구에는 함양군의 역대관리선정비 30여 기가 남북으로 나누어져 각각 두 줄로 서 있다. 원래 이 비석들은 ‘상림(최치원 공원)’이라고 쓰인 돌 표지석 근처에 늘어서 있었다. 그래서 비전거리라고 불렀다. 이곳은 예전에 숲으로 드나드는 주요한 길목이었다. 이 비석들은 제작 시기와 석질이 다른 다양한 형태가 한 곳에 모여 있다. 머릿돌의 문양과 석질, 그리고 비문의 글씨를 비교해서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이 비석군 속에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원인이 되었던 고부 군수 조병갑의 선정비도 있다. 선정비는 원래 곧은 마음으로 백성을 위하여 공무를 수행한 관리의 공덕을 알리는 성격의 비석이다. 조병갑 선정비는 지역에서 철거문제를 놓고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제가 안 되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없애지는 않고 안내판을 세워 비석을 남겨둔 이유를 알려 놓았다. 이곳은 위정자의 바른 역할과 도덕성을 일깨울 수 있는 근신처(勤愼處)가 되었다. 조병갑은 1886년부터 1년 남짓 함양군수로 있었다. 이 비석은 박지원의 송덕비 사건과 두고두고 짙은 대비가 될 것이다. 역사인물공원 남쪽에는 밀양박씨 열녀비가 있다. 이 비석은 조선의 가부장적 사회상을 신랄하게 보여주는 징표이다. 밀양박씨(슬프게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므로)는 함양 안의가 고향이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조부모 아래서 자랐다. 열아홉에 병든 신랑 임술증과 혼인 약속을 지켜 결혼하였다. 남편이 죽자 3년 상을 치른 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약을 먹고 죽었다. 밀양박씨는 안의 현감으로 있던 박지원이 1793년 쓴 『열녀함양박씨전』의 실제 인물이다. 이 기막힌 사건은 불과 200여 년 전에 일어났다. 연암이 짚었던 과부의 재혼은 이로부터 약 100년이 흐른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허용된다. 우리의 관념을 붙잡고 있는 시대의 관습 하나 바꾸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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