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한춘(재창원함양군향우회 자문)씨가 증조부(4대조) 문강공파 25세 백남(柏南)부군 우상하(禹庠夏,1852~1922) 백남공(柏南公)의 서거 100주년을 앞두고 백남유고(栢南遺稿) 유고집과 단양 우씨(丹陽 禹氏) 자료를 수집한 부록을 한글로 발간했다. 백남공은 백전면 경백리 평천마을에 살았으며 묘소는 경백리에 있다. 함양에서 유수한 유림(儒林)으로써 구한말 당시 존경받던 도학자(道學者)로 허성재(許性齋), 유계당(柳溪堂)선생으로 부터 깊은 학문과 몸과 마음의 공부를 익히면서 인격을 닦았다. 재물에 탐착하지 않으며 오직 소박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고 경성(京城)과 대구 월촌(月村)의 종중(宗中) 일을 맡아 처리했다. 효도와 우애로 아손(兒孫)과 유림에 덕을 베풀었으며 가훈을 만들어 손수 실천하면서 자손들을 잘 되도록 가르쳤다. 함양 수동 남계서원에서 일두 정여창 선생의 실기(實記)를 상사 노태현공(上舍 盧泰鉉公)과 함께 편찬하였고 안의 광풍루에서 안의 현감 남만리공(南萬里公)이 백남공을 수시로 초청하여 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백남공이 1992년 세상을 떠나자 셋째아들인 종조부 옥암 택영(玉菴 宅瑛)이 이듬해 1923년에 남긴 문헌을 유집을 편집하였으나 22세 선조 월주 홍전(月州 洪傳 1702~1786)선조의 문집을 미처 간행하지 못한 상황이라서 서재에 보관해 놓고 있던 중에 분실하였고 그 3년 후인 1926년에 기억을 더듬어 다시 성책해 놓은 것이 바로 ‘백남유고’의 필사본이다. 옥암 선조는 1885년에 ‘우천유고(愚泉遺稿)’, 1942년에 ‘월주유고(月州遺稿)’와 ‘무명와유고(無名窩遺稿)’를 각각 간행하였지만 필사본 ‘백남유고(柏南遺稿)’는 미처 목판에 올리지 못하고 있던 중 광복이 되고 옥암선조는 1954년 갑자기 별세하여 조카인 증현(增鉉, 한춘의 선고)공이 보관하고 있었다. 한춘(漢椿)의 선고 옥천 증현공((玉泉增 鉉公), 1913~1998)도 별세하자 그 원고마저 분실되어 백방으로 찾던 중, 2017년 1월27일 단양우씨 대종회 우왕명(禹旺命) 전 사무국장이 2011년 코베이(WWW.kobay.co.kr)에서 경매로 구입하여 소지하고 있다는 들었고, 단양우씨 밴드와 카페를 운영하는 문강공파 홍보부장 승환(昇煥)족인과 단양우씨시향전례위원 영립(永立)족제의 주선으로 흔쾌히 기증받아 20년만에 자손(子孫)인 한춘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단양 우씨(丹陽 禹氏) 문강공파 29대손인 한춘씨는 증조부 백남공의 진실한 인간적인 삶과 사랑의 글귀가 담긴 집안의 백가지 보배중의 보배, 천신만고 끝에 찾은 유고집이 세대가 멀어지고 세월이 지나면 이것마저 없어질까 두려워, 경남도청에 같이 근무했던 장경일(張璟一)법령존자에게 부탁하여 한글로 번역, 발간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했다. 한춘씨는 “백남유고(栢南遺稿) 발간에 필사본을 기증하신 왕명(旺命)종인, 각종자료를 제공한 승환(昇煥)족인, 대구 월촌(月村)문중 주원종인, 사우당 문중 상기(相基)족손, 송식(松植)당질, 특히 난해한 한문을 해석하고 서문과 책표지 제호를 써 준 창원 문성대 평생교육원 한문학과 월사 이병천(李秉千)교수, 장기간 어려운 백남유집(栢南遺集) 필사본을 해석하고 편집을 해 준 고서변역가 법령존자 장경일(張境一)선배, 교정에 동참을 해 주신 이근영 선생님과 마지막 원고 교정을 정리한 시조시인이며 수필가 현숙동생, 출간에 도움을 주신 새롬 출판사 김명섭 사장님께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한편 우한춘 재창원함양향우회 자문은 경남도청에서 35여년 공직근무, 서기관으로 정년퇴직 후 참선공부를 하면서 자서전(괴로우니까 사람, 사람이니까 행복)을 발간했다. 우씨는 “선조의 높은 뜻에 후손으로 어찌 만분의 일인들 도리를 다하겠는가! 삼가 엎드려 존숭(尊崇)하면서 조상의 위덕(威德)에 누가 될까 두려운 마음뿐”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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