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중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분이 있을 것 같다. 다음은 필자가 최근 경험한 일이다. 한 달쯤 지난 것 같다. 별생각 없이 병원을 찾았다가 병원 문에 붙어 있는 경고문을 보고 “아차”하며 무릎을 쳤다. 아내가 챙겨준 마스크를 책상 위에 두고 왔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 약국으로 달려가 마스크를 사 끼고서야 병원에 들어 갈 수 있었다. 또 며칠 전에 군청을 찾았다. 현관을 들어서자 한 직원이 이것 좀 기록하고 손 소독을 해 달라는 것이다. 적어야 하는 내용은 이름, 날짜와 시간, 연락처, 방문지 등이었다. 그리고 민원실에 들어가 일을 보기 위해 직원에게 “OO일로 왔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라고 물었다. 직원은 “몇 번 창구로 가세요.”라고 말했다. 발걸음을 돌려 창구 앞으로 갔다. 직원과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신분증을 주었는데, 직원이 다시 밝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알고 보니 막내가 다니는 학교 학부모로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분이었다.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로 인해 가까운 사람도 알아보지 못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요즘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에 나오는 단어가 몇 개 있다. 그중 하나가 마스크다. 코로나19의 전파 경로가 비말과 접촉이라고 밝혀지면서 마스크는 우리 생활에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이제는 필수품을 넘어 돈 주고도 못사는 귀한 것이 되었다. 얼마 전 아내가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왜 우체국 앞에 사람들이 저렇게 많아요!”라고 물었다. 그날이 바로 우체국에서 공적 마스크를 판매하는 첫날이었다. 그러다 보니 ‘금으로도 살 수 없다는 마스크’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선 것이다. 작은 일상의 이야기지만 그 중심에는 코로나19 사태가 있다. 이제 코로나19는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일반인들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확진자는 입원과 격리, 일선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은 예방과 방역, 의료진은 치료와 검사, 소상공인들을 중심으로는 경기 침체로 인한 경제적 피해 등.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단절과 거부가 아니라 함께 함이다. 그래도 긍정적인 모습은 기업은 기업의 방법으로 시민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함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가 할 수 있는 것과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고민 끝에 “참여”란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는 73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회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예배와 모임의 최소화로 2주간 주일 오전 예배만 드렸다. 그러다가 지난 주일은 73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주일 예배를 가정예배로 대체하는 일이 있었다. 목사로서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드린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의 불안과 조속한 진정을 위해 함께 협력하고, 사회적 거리두기에 참여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이런 결정을 하면서 좀 더 의미 있는 가정예배가 될 수 없을까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래서 추가로 결정한 것이 주일 가정예배 때 드린 헌금을 각 가정이 자유롭게 코로나 성금으로 기부하도록 했다. 몇 가정이 얼마나 참여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주일이 지난 후 연세 드신 교우 몇 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목사님 어떻게 기부해요? 목사님이 대신 기부해 주세요.” 참 감사했다. 의도와 의미를 알고 함께 해 주신 교우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참여는 씨앗과 같다. “사과 속의 씨앗은 셀 수 있어도, 씨앗 속의 사과는 셀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작은 나눔과 섬김, 봉사의 참여는 코로나19를 이겨내는 치유와 회복의 씨앗이 될 것이다. 지금 보잘것없는 이 작은 씨앗을 심지 않는다면 코로나19가 완치되어도 우리의 삶과 사회는 지난날의 친근함과 웃음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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