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의 장편소설 《지리산》, 아주 오래 전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책을 읽을 당시의 전율은 지금도 가슴을 뛰게 한다. 아마 전 권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한 번에 다 읽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입에 올려서도 안 되는 금기어였던 지리산 빨치산에 대한 이야기가 《지리산》 외에도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태의 《남부군》, 정지아 《빨치산의 딸》 등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 중에서도 지리산에 나오는 ‘하준규’라는 인물에 한동안 머물렀다. 남도부(南道釜), 본명은 하준수(河準洙, 1921-1955)로 그는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예전에는 우루묵이라 불리던 마을에서 태어났다. 함양산청에서는 아마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이 빨치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이기에 따라 평가는 지금도 극명하게 좌와 우로 나누어진다.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나는 암울한 격변기에 우리가 겪어야 했던 역사적 사실이기에 피상적인 사건 중심보다는 내면적 사상과 사회적 배경으로 조금씩 이해하는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다.하준수는 24년간 병곡면장을 지낸 아버지가 함양군에서는 손꼽히는 천석꾼 부자라 어려움 없이 자랐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초라해 보이지만 약 200여 년 전 조선 순조 때 지은 열두 채 기와집에 450평 규모의 대저택은 그의 어린 시절을 상상할 수 있다. 돈도 있고 머리도 있었기에 그는 함양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진주로 유학을 갔다. 진주중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7년 일본인 교사를 폭행하여 퇴학을 당했다. 퇴학 후 일본 가와구치로 가서 준일상업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일본주오대학(중앙대학) 전문부에 입학했다가 1943년 일제의 학도병 동원령이 내려지자 귀국하여 집 뒤편에 있는 괘관산(1,252m, 현재는 대봉산)에 숨었다. 이후 징병 거부자들이 계속 들어오자 이들을 규합하여 지리산으로 이동하여 ‘널리 나라의 빛이 되자’는 의미로 73명이 모여 ‘보광당(普光黨)’을 결성했다. 당시 이들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총기를 탈취하고 항일무장투쟁이 주요활동이었으며, 보광당 인원은 계속 늘어 150명에 달했다. 하준수가 일본으로 갔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제3기로 병참기지화, 전시동원시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식민지 국민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발악하던 때였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러시아 혁명으로 공산국가 소련이 탄생한 후 좌익사상인 공산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한국계 유학파들도 자연스럽게 사회주의나 공산당 이념을 접하게 되었으며 반대로 친일파가 된 사람도 많았다.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에서 투쟁의 주체는 노동자, 농민, 소작농 등 무산계급이며, 투쟁의 대상은 자본가와 지주 등 유산계급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유학파들 중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아나키즘에 빠진 사람들은 그들이 투쟁의 대상으로 삼은 유산계급의 자녀들이다. 왜 이들은 스스로 험난한 길을 선택했을까? 단순히 시대적 조류나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변화와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것만은 아니다. 큰 틀에서 보자면 식민지 국가의 국민들은 모두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권력을 소유하지 못한 피지배층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지배했다. 따라서 그들의 투쟁대상은 일본제국주의로 자연스럽게 귀결되어 항일과 독립이 목표가 되었다. 소설 속 하준규가 “우리에겐 조국이 없다. 다만 산하만 있을 뿐이다”고 말한 대목에서도 식민지 프롤레타리아 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하준규가 보광동을 조직하며 내세웠던 기치(旗幟)도 “해방 조선 땅에 평등사회를 실현하자”, “곧 건국할 민주대한은 더 이상 외세의 간섭을 안 받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였다. 이것은 단순한 항일무장독립투쟁을 뛰어넘어 해방 이후 이 땅에 세워질 공동체 사회질서까지도 염두에 뒀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독립된 나라는 기대와는 달리 남북으로 갈라지고 남한은 미군정체제 아래 놓였다. 남도부는 보광당 당원들에게 “미국의 간섭 때문에 이 땅에 자주적인 민족국가는 수립될 수 없다. 산 속으로 들어가 미군정과 투쟁함으로써 우리의 이념과 가치를 발휘하자”고 외쳤다. 하준수는 해방과 동시에 이러한 보광동의 기치를 직접 실천했다. 일화에 의하면 해방이 되자 자기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모아놓고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당신들도 이제 해방이다. 이곳을 떠나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하라”고 말했다.해방 이후 남도부의 행적과 그 이후해방이 되자 하준수는 지리산에서 나와 여운형 주도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고 여운형을 정신적 지도자로 따르며 함양의 건준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미군정 하에서 하준수가 잡아들였던 일제순사와 하준수와 싸웠던 조선인 순사들까지도 경찰로 다시 채용되었다. 결국 하준수는 1946년 초 헌병들에게 붙잡혀가기도 했다. 1946년 1월23일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되고 남로당이 하준수를 입당시키려고 했으나 하준수는 입당을 거부했다. 아마도 이때까지는 그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함양에서 영향력 있는 우익인사였던 장인 이민종의 추천으로 이승만의 경호대장으로 뽑혀 서울로 올라갔지만, 곧 그는 이승만에게 실망하고 함양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그가 조직했던 건준은 이미 와해되었고, 경찰들이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체포에 혈안이 되자 1946년 늦여름 그를 따르는 무리와 덕유산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1947년 7월19일 정신적으로 추종하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남로당에 입당했다. 그 후 1948년 4월20일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며 공산주의에 상당히 동조된 것으로 보인다. 강동정치학원 군사교관으로 있다가 1949년 조선인민유격대가 창설되자 제3병단 부사령관이 되어 태백산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6.25전쟁 시기에도 태백산과 일월산 일대를 무대로 유격전을 이어갔다. 휴전 후인 1954년 1월 대구에서 체포되어 10월 14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판결의견서를 보면 “괴뢰 노동당 중앙당부 직속 대남 유격대 총사령관, 대남 유격대 제3지대장 등을 역임한 강원도, 경상북도 일대의 유격대 총책임자로서... 국군사살 80여 명, 미군사살 16명, 경찰관사살 70여 명, 생포 10여 명...”이라고 그의 신분과 전과를 밝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5년 8월 어느 날 서울 수색의 육군사형집행장에서 총살당했다. 이때 그의 나이 35세로 파란만장했던 짧은 인생이 비극적으로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남도부와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참모장 차진철(본명 성일기)은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남도부라는 사람은요 원래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진보적인 민족주의자였죠.”라고 평가했다.인간 하준수의 가정사소설 《지리산》의 마지막 권에는 “하준규의 유아 3남매를 만났다. 큰 딸은 하와이로 시집가서 살고 남매는 서울에 있다. 딸들은 미인으로 아들은 미장부로 자라 있었다”라고 적혀 있다. 사실 남도부는 해방 후 천석꾼 집안의 딸과 결혼하여 1남2녀를 낳았다. 하준수의 부인은 명당에 조상묘를 써 당대 천석꾼이 된 이석신의 아들인 사근부자 이민종의 딸이다. 또한 망실공비로 마지막 빨치산인 정순덕의 증언에 의하면 남도부는 상당한 미모의 산중처가 있었으며 그녀는 51년 12월경 남도부의 아이를 출산했는데 자신이 산파역을 한 간병부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남도부 부대는 울산, 경북, 강원도가 주 무대인 반면 정순덕의 남부군 활동은 지리산서부지역이라 그들이 만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은 정순덕의 증언이 유일한 증거라 신빙성이 떨어진다. 《함양문화 제12호》에 실린 구본갑의 ‘지리산 빨치산 하준수 스토리’에는 하준수의 가족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병주 증언은 사실과 다르다. 아내(함양여성동맹위원장)는 동란 후 북한으로 들어가 행방불명되었고, 아들 상영은 연좌제 때문에 한정치산자가 되었다” 이 글에 나오는 하준수의 자녀들과 관련된 내용들을 좀 더 정리하여 보면, 남도부가 사형을 당하기 며칠 전 맏딸 인자를 면회실로 불러 마지막 유언을 했다. “인자야... 아버지가 없어도 절대로 기죽고 살아서는 안 된다. 동생(경자, 상영)들을 잘 데리고 살아다오” 그 후 맏딸 인자씨는 함양 삼일여관 며느리로 들어갔다. 시댁 배려로 경자, 상영 두 남매는 사돈집에서 더부살이를 할 수 있었다. 아들 상영씨는 연좌제에 걸려 군대를 갈 수 없었고 취업이나 공직에도 나갈 수 없어 청와대 앞에서 연좌제 폐지 시위를 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문초를 당했다. 경희대 체육과를 졸업하고 친지들의 도움으로 가방 제조업을 했던 상영씨는 41세인 1988년 4월26일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산청함양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3,226표를 얻었지만 낙선했다. 이후 제14대(1992년 3월 24일, 신정치개혁당, 1,479표 득표), 제15대(1996년 4월 11일, 자유민주연합, 1,170표 득표)에 연달아 출마하였으나 모두 낙선했다. 그가 이렇게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알리고자 했던 것은 그의 말대로 “아버지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역사가 해줘야 될낀데. 아버지를 좌익분자라고 하지 말고 민족주의자라고 하소. 그기 맞소. 외세개입을 온몸으로 막은 분을 함부로 매도하면 쓰겠소?”라는 절규였다. 자료를 찾아가며 정리하고 글을 쓰면서 나는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군경에 쫓기는 걸음을 뒤쫓아 따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눈 덮인 산을 함께 넘기도 했다. 과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목숨까지 바치게 만들었을까? 내가 찾은 도천마을은 여느 농촌마을과 다름없이 한적하고 조용하다. 입구에서 개울 길 따라 안으로 들어서니 곧 마을회관이 나왔다. 좌측 뒤편으로 보이는 폐가가 한 눈에 봐도 하준수의 생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입구는 온통 쓰레기와 잡풀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고 기와지붕 한 모퉁이는 주저앉고 있다. 인기척에 놀란 고양이 한 마리가 뛰쳐나오는 바람에 잔뜩 긴장한 마음이 화들짝 놀라며 안으로 들여 놓는 발걸음이 더욱 느려진다. 주인 잃은 집 문패는 하홍수라 되어 있다. 하준수의 친척 동생이 이 집을 사서는 관리하지 않고 방치해 놓았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워 애써 외면하고 있는 듯하다. 상처를 주고받은 당사자들에게 뭐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불행했던 과거도 우리의 역사이기에 무조건 묻고 가자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마을 한가운데 저렇게 흉물스럽게 방치해 두고 있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며 매 순간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불편할 것이다. 근처에 있는 대봉산휴양벨리와 연계하여, 마을의 하륜부조묘, 용천송, 효자비, 곡성영화촬영지와 정자들을 살린다면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민가와 돌담이 조화를 이루는 멋진 곳이 될 것이다. 특히 하륜(河崙)의 후손으로 진양하씨(河氏) 중시조인 하맹보(河孟寶, 1531-1593)의 효(孝) 관련된 일화가 전하는 용천송, 용천샘, 효자비는 효와 예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곳이다. 따라서 전향적인 자세로 접근하여 우루목마을을 역사의 현장, 교육의 현장으로 탈바꿈 해보는 것은 어떨까? 머잖아 서함양IC까지 개통되면 접근성까지 좋아진다. 이제는 아픈 역사의 상흔(傷痕)을 극복하고 좋은 방향으로 승화 시키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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