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은 유난히 따뜻하다. 따뜻한 겨울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점이 있긴 하지만 심각해지는 전 지구적 기후변화의 과정 속에 있기에 다가올 재앙들을 생각하면 두렵기만 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과학자들은 현 자본주의 시대를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인 ‘인류세(anthropocene)’로 규정하고 있다. 1만 년 전에 시작된 ‘충적세(holocene)’가 종말을 고하고 인간이 자연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현재 지구 생태계가 캄브리아기 이후에 지구에서 일어났던 5번에 걸친 생명의 대멸종의 상태와 유사하며 6번째 멸종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다고 과학자들은 입을 모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절박한 경고가 사회 전반에 크게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대적이고 근본적인 노력이 없이는 우리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온난화의 주범인 화석에너지를 태양에너지, 풍력, 바이오에너지, 소수력 등의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하려는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이 결코 기존 화석에너지나 원자력에너지를 부분적으로 보완하고자 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신재생에너지로의 완전한 전환을 목표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조건에서 가장 심각한 환경에 있음에도 우리나라는 정부의 미온적 태도와 에너지 재벌들의 막강한 파워로 인해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 비율이 OECD 국가 중 꼴찌다. 게다가 오염물질을 뿜어내는 이유로 신재생에너지로 분류해서는 안 되는 폐기물 비중이 절반을 훨씬 넘고 있으니 갈 길은 더더욱 멀다. 그럼 신재생에너지로의 완전한 전환을 이루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거의 모든 신재생에너지들은 에너지 밀도에 있어서 기존 화석연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낮다. 즉 같은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훨씬 넓은 공간과 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50개에 달하는 거대한 프로펠러로 대관령을 점령한 풍력발전단지로는 강릉 인구의 절반 정도인 5만 가구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을 뿐이다. 또 태양광발전을 통해 현재 요구되는 전기를 얻고자 한다면 국토의 상당량을 태양광패널로 덮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대규모 시설은 또 다른 엄청난 생태계 파괴를 가져오게 된다. 어떤 에너지원이든 공급에 있어서 집중화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량이 무거운 차가 한번 다리를 통과하는 것은 가벼운 자동차가 수백 대 지나는 것만큼 부담을 다리에 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당장 농촌에서는 여러 종류의 에너지 생산시설을 작은 규모로 분산 설치하여 그 인근 지역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다. 특히 무분별하게 외부 업자들에게 사업허가를 내줘 지역민들과 마찰을 겪고 마을 경관을 해치며 산림을 파괴하는 기형적인 태양광 사업이 아니라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협력하여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함으로써 ‘에너지 주권’을 되찾아올 필요가 있다.그럼 도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와 같이 모든 것이 도시로 집중된 구조 속에서 분산적 에너지원으로는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기란 불가능하다. 국토의 0.6%에 불과한 면적을 가진 서울의 인구는 약 20%를 차지한다. 게다가 도시는 결코 에너지를 비롯한 모든 면에서 생산적일 수 없다. 맑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의 균열’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했으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농촌과 도시의 분열’이라 했다. 도시에 집중된 인구가 분산될 수 있도록 하는 연구와 정책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에너지 사용에 대한 모두의 성찰이다. 지금처럼 흥청망청 에너지를 쓰는 자본주의 산업구조 전반과 각자의 삶에 있어서 거대한 전환이 없이는 그 어떤 에너지원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 진정한 에너지에 대한 대안, 나아가 멸종 위기에 처한 우리의 대안은 물질적 방안이 아니라 바로 우리 스스로의 의식과 삶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