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는 1월 30일 0시 기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우한 폐렴)로 인한 누적 확진자 7,711명, 사망자 170명이라고 발표했다. 중국정부의 노력에도 중국을 넘어 세계 각지에서 의심환자와 확진 환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중국뿐 아니라 세계가 힘을 모으고 있다. 우리 정부에서도 우한으로 전세기를 보내 우리 국민들을 데려올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의 발표 후 국민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위험을 함께 공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과 입국자들 때문에 국내에 확산 될 것을 두려워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모습을 보며 인간이 안고 있는 불안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다양한 문제와 환경 앞에서 “불안”을 경험한다. 불안으로 내몰린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극도로 예민해지고 강한 “경계심”을 가지게 된다. 이런 불안과 경계심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나와 너’,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중국 사람과 한국 사람’, ‘중국을 다녀온 사람과 아닌 사람’ 등으로 “분리”한다. 경계와 의심, 분리가 우리의 불안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필자는 단언하건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란 논문에서 인류가 어떤 방법으로 “터부(Tabu)-금기”를 사용했는지 밝히고 있다. 터부의 단어적 의미는 상반된 두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신성한’, ‘봉헌된’, ‘일상을 넘어선 고귀함’이고, 다른 하나는 ‘끔찍한’, ‘무거운’, ‘금지된’, ‘순수하지 못한’이다. 프로이트는 “터부”가 사용된 목적을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을 인용해 여섯 가지로 정리했다. 이를 축약하면 종교적 정치적 안정과 권위를 위한 금기(분리), 사회적 안정과 삶을 위한 금기(분리)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문명의 발전으로 많이 약화한 면이 있다. 그러나 후자는 더욱 체계적으로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류는 후자를 사회적 안정과 삶을 위해 사회제도로 발전시켰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사람들은 불안을 극복하고 안전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원시시대부터 “터부(금기)”를 사용했다. 터부는 사람의 행동을 제약했고,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분리를 가져왔다. 이런 제약과 분리는 추방과 단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쉼과 회복, 안전을 위한 것이었다. 즉 공동체는 문제를 통해 얻게 된 ‘불안-경계-의심’을 “분리”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가 ‘문제와 불안’을 극복하고 회복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 기회는 일방적으로 개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가지는 기회였다. 한 예를 본다면 구약성경 레위기 13,14장에는 나병(악성 피부병)에 관한 판결과 정결 예식이 기록되어 있다. 그 과정은 ‘나병의 발견-제사장의 진단과 판결-공동체와 분리-회복-정결 예식을 통한 공동체 복귀’로 이루어져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개인의 아픔과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지 않았다. 개인의 아픔과 문제를 공동체(대표)가 진단하고 분리를 통해 회복의 기회를 주었다. 이것이 진정한 터부의 지혜다. 오늘 우리가 직면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우한 폐렴) 문제는 ‘경계와 의심이 가득한 분리’의 방법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이런 방법을 갈망할까?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순간의 위기는 모면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우리의 이기심을 뒤로하고, 아파하는 자들에게 ‘쉼과 회복의 분리’를 주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기심을 내려놓고 그들의 회복을 응원하며 기다려야 한다. ‘쉼과 회복의 분리’라는 순환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기다려야 한다. 오늘은 ‘내’가 ‘너’를 기다려 주고, 내일은 ‘너’가 ‘나’를 기다려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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