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마지막 날,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눈이 올 법도 한데 이제 눈은 강원도에만 내리기로 결심했는지 여기는 오지 않는다. 지리산 자락에 집을 지은 지 이십년이 다 되어 가는데 눈을 보지 못한 겨울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떤 해는 시월에 눈이 내려 늦장미를 얼리기도 했고 언젠가 춘삼월에 폭설이 내려 만개한 크로커스와 산수유를 시련에 빠뜨리기도 했는데 다 옛이야기다. 막상 눈이 내리면 경사가 급한 산비탈 집이라 우리 가족은 차를 이용할 수가 없고 곶감 택배가 한창 나갈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눈 치우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데도 매년 오던 눈이 오지 않으니 기다려진다. 기다려도 소식이 없으니 섭섭하고 그래도 겨울인데 겨울이 이래도 되는가 싶다. 올 겨울엔 확실히 벽난로에 장작도 별로 안 들어간다. 다음 주가 입춘이다. 곶감 포장하느라 주문 받은 곶감 택배 부치느라 계절 바뀌는 줄 몰랐는데 어느새 봄의 문턱이라니... 봄이 온다는데 겨울이 혹독했더라면 봄이 반가울 텐데 겨울이 이만저만하니 봄이 온다지만 반갑기는 커녕 오는가 싶기만 하다. 곶감 농사를 하는 나로서는 아직 포장하지 못한 곶감을 손질할 때까지 매서운 추위가 한두 번 더 왔으면 싶다. 대부분의 곶감 농가는 설전에 곶감을 다 팔았는데 나는 아직 포장도 못한 반시와 단성시 곶감이 남아 있다. 곶감은 겨울 한 철에 소비되는 계절 먹거리고 설전에 대부분 소비되기 때문에 곶감 농가에서는 어떻게든 설전에 곶감을 다 팔아야하는데 말이다. 근데 도대체 나는 뭐한다고 아직 반시곶감이랑 단성시 곶감이 손질도 못한 채 남아있는 거지? 이게 다 내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내가 지난 가을에 그동안 만들어오던 고종시와 대봉 외에 반시와 단성시를 깎아 모듬 곶감을 신상으로 출시하겠다고 했을 때 절터 아지매가 콧방귀를 뀌면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하던 거나 더 잘 할 궁리를 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나름 이게 참 기가 막힌 아이디어라고 믿었고 그동안 만들어오던 고종시와 대봉 외 단성시와 반시감을 더 깎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겨울이 겨울답게 추웠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겨울이 겨울답지 않게 따뜻하고 올해는 설이 예년에 비해 열흘 정도 빠르다보니 설날 선물상품 만들기에 집중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단성시와 반시곶감은 냉동 창고에 넣어두고 그동안 만들어오던 고종시와 대봉곶감에 매달려야만 했다. 어쨌든 올해는 운이 좋아 생각지도 않은 대봉 반건시가 잘 만들어졌고 고종시도 예전처럼 맛있게 잘 만들어져 설날 선물상품으로 반응이 좋았다. 이제 설이 지나고 여유가 생겨 냉동 창고에 보관 중이던 반시와 단성시를 손질하고 포장을 하는데 때깔이 밝은 것도 있지만 옅은 초콜릿 색깔이 많다. 반시와 단성시는 수분이 많은 감이라 무유황으로 말려 핑크빛 곶감을 바란다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하얀 분을 낼 생각으로 포장을 하고 있다. 애초 반시와 단성시 원료감을 구할 때 크고 좋은 것을 구입해서 선물상자에 담을 생각이었지만 설이 지나버려 모두 지퍼백에 가정용으로 담는다. 좋은 취지였다. 반시 감을 깎을 때만 해도 내가 이것들을 잘 말려 고급 선물 상자에 포장하고 반시의 제왕이라는 상품명을 붙여주려고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봉다리에 담고 있다. 정말 의도는 좋았는데 말이다. 그나마 위안은 이게 냉동창고에서 오랜 시간 숙성이 잘되어 맛이 기대 이상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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