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입에서 냄새가 나!” 설 연휴 마지막 날 아쉬운 이별의 포옹을 해주던 아린이가 손가락 두 개로 제 코를 막으며 뜻밖의 귓속말을 건넨다. 어, 어, 그래 그랬었구나... 아이가 저만치 기다리던 제 엄마에게 달려가 뭔가 보고를 하는 듯했다. 모녀는 크게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하고 차는 떠나가는데 김영감은 당혹감속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명절치레에 지친 할머니는 코까지 고는데 김영감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진작 그놈의 담배를 끓을 걸... 생각이 복잡해졌다. 하나뿐인 딸이 싱글이 되고 명절을 친정에서 보내게 되면서 김영감댁의 명절문화는 바뀌었다. 음식을 장만하면서도 며느리들은 전에 없이 살가움을 떨었고 차례를 지내고 나서 갑니다 소리를 못하고 아들들이 안절부절못하던 풍경도 사라졌다. “처가에도 가야할테니 차례 지내면 일찍들 가요, 내가 마무리 잘할게. 그 대신 아버지도 이제 70이 넘으셨으니 최선을 다해 즐겁게 해드리기야, 막내오빠도 정치얘기는 꺼내지 않기” 아마도 이런 묵계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들들이 점심도 마다하고 권리를 행사하듯 떠나 갈 때도 섭섭함 보다는 남은 연휴를 딸네와 함께 오붓하게 보낼 생각에 설레임이 앞섰다.그나저나 제 딸을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는 줄 알면서 미리 주의를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세배 돈을 챙기고 나서도 시도 때도 없이 달려와 뽀뽀를 해대던 녀석이 아니 작별의 순간에 이렇게 할아버지의 “쪽”을 팔리게 해놓고 떠나 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문득 이건 딸의 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치질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냄새도 조금은 났겠지만 아린이 코가 개코란 말인가? 냄새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아비에 대한 연민이 앞섰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상처 받을 수 있으니 내색하지 말고 잘 대해 드리면 좋겠구나...”그 보상으로 어떤 것이 제시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리한 손녀는 상황을 이해하고 냄새를 참아가며 뺨을 부벼주었을 것인데 황홀해 하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딸은 드디어 담배를 끓게 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영감은 이제 손녀딸이냐 담배냐를 선택해야하는 곤혹스런 처지에 놓여 버렸다. 더구나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도 장장 10여초를 꼬옥 안아주던 5살짜리 아린이의 신뢰와 사랑을 어찌할 것인가!에필로그(epilogue) 김영감은 현명한 노인이다. “벤자민 버튼”처럼 시간을 거꾸로 살 수 있다면 이제 10대 후반의 멋진 브래드 피트의 모습으로 어려가고 있을 테지만 그건 환타지 일뿐, 어차피 몸도 마음도 늙어 갈 것이고 옛날같지 않은 “老人(노인)이라는 權威(권위)”만으로 감당하기에는 남은 여생이 너무나 길다는 것을 잘 아는 김영감은 어찌해야 세상과 소통하고 손녀에게 사랑 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지혜로운 노인이다.그래서 김영감은 궁금하고 불편하다. 노소를 불문하고 모르는 것은 배워야 하고 부족한 것은 채워야 한다. 페이스 톡은 어떻게 하고 넷플릭스가 뭔지도 궁금하지만, 흡연이나 식사예절 같은 공공질서는 잘 지키고 있는지도 걱정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발 맞추려면 알아야 할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젊은이들과 소통이 중요하다는데 뭘 알아야 소통도 하는 것 아니겠는가? 헌법 제31조 1항에는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5항에는 “국가는 평생교육을 진흥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는데,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의무와 권리의 주체로서 당당하게 여생을 누리고 싶은데 그저 “잘 모시겠다”고 하면서 경로당에 노래강사나 보내주고 노령연금 올려준다며 노인을 표로만 보는듯한 社會的 黙契(사회적 묵계)가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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