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는 말도 있지만 뭐 같이 하는 것은 훌륭한 덕목이 될 수 있다. 위와 같이 하면 훌륭한 인물이 되지 않겠는가. 최영(1316~1388) 장군이 그런 위인(偉人)이다.한강 하류 양천에 투금탄 (投金灘)이란 지명 전설이 전해진다. 고려 후기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는 시조 <다정가>로 유명한 이조년(1269~1343)과 그 형 이억년 두 형제는 어느 날 길을 가다 우연히 금덩이를 주워 사이좋게 나눠가졌다. 그리고 양천나루에서 배를 탔는데 배가 강 가운데 이르자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에 던진다. 형이 이유를 묻자 금덩이 때문에 우애를 해칠 것 같아 버렸노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형도 자신의 것을 강에 던진다. 그 후 이 여울을 두고 투금탄이라 불렀다. 그 아름다운 형제 우애 전설의 주인공 이억년은 고려말에 벼슬을 그만두고 지리산 함양에 은거하여 묻히었다. 묘소가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에 있다. 함양에 다시 한번 황금 전설의 주인공이 등장하니 황금 술잔, 금잔(金盞) 이야기의 일두 정여창 선생이다.정여창(1450~1504)은 호를 일두(한 마리 좀)라 하는 조선 성리학자요 성리학의 순교자 4대성인이다. 조선 초기 문묘에 종사된 동방오현이다. 동방오현 최초의 서원 남계서원은 세계문화유산이다. 정여창은 이시애의 난에 순국한 부친 정육을의 시신을 18세의 청년으로 함경도 길주에서 함양까지 천리길을 운송하여 반장하였다. 삼년상을 시묘하고 모친도 지극 정성으로 모시었고 돌아가시자 다시 3년 동안 시묘하였다. 효자로 천거되어 벼슬이 내렸으나 사양하였다. 성종대왕의 강권으로 소격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이왕 벼슬하려면 자력으로 하지 부모덕으로 하겠나 하면서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고 친구 탁영 김일손의 추천으로 사관이 되었다. 정여창은 세자시강원 설서로서 세자 연산군의 스승이었다. 당시 연산군을 가르친 다른 스승도 있었으니 허침(1444~1505)과 조지서(1454~1504)이다. 조지서는 정여창과 같이 동료가 되어 연산군을 가르쳤으나 인성교육에는 실패하였다고 하겠다. 명현이 가르쳐도 포악성은 개량하지 못하였다. 인성은 교육이 되는가 천성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정여창은 연산군의 싹수없음을 보고 피난차 중앙을 벗어나 지방관직에 자원하여 함양 이웃고을 안음현감에 부임하였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붙들려가기 전까지 4년 동안 선정을 베풀었다. 합천에 처가가 있어 자주 왕래한 한훤당 김굉필(1454~1504)과 안음현감 정여창은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동문수학한 절친이어서 가끔 근처에서 상봉하여 즐기었다. 어느날은 김굉필이 친구 안음현감 정여창을 찾아왔다. 관아에서 술자리가 벌어지자 그때 김굉필은 감짝 놀랐다. 현감이 황금 술잔 금잔(金盞)에 술을 따라주는 것이 아닌가. 책하며 “나는 자네가 이런 무익한 것을 만들 줄 꿈에도 몰랐네. 후세에 반드시 이것 때문에 사람을 그르칠 것이네” 하였다. <景賢錄 / 事實> 김굉필은 예언자적 지혜가 있었다. 이 금잔 사건도 그렇고 당시 선비의 풍조가 청담을 일삼던 죽림칠우의 진풍(晉風)과 같아 사림의 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여 무오사화를 예견한 것도 그러하였다. <一蠹先生遺集卷之二 / 附錄 / 事實大略 / 十一年 燕山四年> 무오사화(1498,연산군4)로 정여창이 떠난 지 20년 만에 김굉필의 예언대로 금잔 때문에 사단이 발생하였다. 중종 14년(1519) 4월 4일에 전 안음현감 윤효빙이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상중이라 체직되어 떠나며 봉쇄된 관아 창고를 임의로 열어 조정도 알고 있는 금잔, 은잔을 훔쳐갔다는 것이다. 장물죄 피의자로 진주 옥에 갇혔다가 담을 넘어 도망가고 말았다. 경차관 남세준과 진주목사 신영홍은 윤효빙과 교분이 두터워 일부러 도망가게 한 것이다. 그래서 윤효빙은 장물죄 처벌을 면하고 신영홍은 우정을 과시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해가 1520년(중종15) 지금으로부터 딱 500년전이다. 9월 9일에 윤효빙의 아들이 상소하여 자기 부친이 아전들의 모함으로 누명을 쓴 것이라고 억을함을 진정하였다. 향리(鄕吏) 임종(林從)이 전부터 윤효빙을 미워하였으므로 모함한 것이다. 요새말로 자기 방어권을 위하여 탈옥한 것이라는 것이다. 결론이 어찌 났는지 《중종실록》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 후대 문헌에 진주의 인물로 윤효빙이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잘 처리된 것 같다. 황금 술잔을 탐하여 훔쳐갔는지 아전의 모함으로 누명을 쓴 것인지 씨씨티비를 돌려보면 알겠지만 당시에 없으니 진실공방, 음모론, 진영논리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정여창이 의전용 황금 술잔을 만들어 전한 것이 김굉필의 지적대로 잘못한 것인지 잘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눈앞에는 무수한 유혹 거리가 있다. 유혹 거리가 많다고 해서 다 유혹당하지 않는다. 금잔이 있어도 탐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가령 금은방을 터는 강도가 있다 하자. 금은방이 나쁘다고 다 없애라고 해서야 되겠는가. 스스로 양심을 지키는 것이 지도자의 덕목이다. 극기복례가 그것이요, 징분질욕이 그것이요 존천리(천리를 보존함), 알인욕(인욕을 막음)이 그것이다. 성리학적 인격수양이 된 사람은 황금 술잔 보기를 토기 잔처럼 여길 것이다. 정여창은 황금 술잔을 토기 잔 같이 보는 인격수양을 실현한 것이다. 탐심을 잘 절제한 것이다. 인격수양의 승리이다. 500년이 지난 지금 시대에 눈앞에 금잔이 있다고 하자. 공적 지도자가 의전용으로만 쓸 것인가, 몰래 훔쳐가 자기 집안에서 쓸 것인가, 탄핵받아 뇌물죄로 처벌받고 망신당할 것인가, 안 들키고 남몰래 므흣 술 마시며 즐길 것인가. 스스로의 양심과 법 앞에 처신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황금 술잔 금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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