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기관의 무인기 발권이 시작된지는 오래 되었지만 이제 그 영역이 확장되어 일상의 곳곳에서 무인기를 마주친다. 셀프 주유를 비롯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의 무인주문, 패스트푸드점의 키오스크는 대면할 때마다 편의보다 위협을 느낀다. 마주하던 사람이 사라지고 기계를 대면하는 일이 빈번해지면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기계적인 인간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2019.6.29자 한겨레 커버스토리는 “무인시대”였다. ‘동네식당, 편의점, 카페까지··· 사람 대신 기계가 일한다’는 머릿기사가 가로로 지나가고, 여백을 이용하여 사이드 메뉴처럼 스토리를 축약한 문자를 내보냈다. “인건비 절감, 비대면 선호, 무인주문기가 1.5명 몫을 해내, 혼밥손님들 눈치 안봐 좋아해” 등. 그리고 몇장의 사진 중에 로봇 바리스타가 내린 커피와 빵을 고객에게 전하는 빵셔틀 로봇도 소개했다. 이 기사를 읽다보니 인건비 절감이 중요한 사업자와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이 동시에 겹치고 대면과 비대면은 미묘한 간극을 가진 양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핏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필연처럼 지나갔다.
최근 제주항공에서 키오스크 발권이 아닌 카운터 발권에는 수수료 3천원을 추가하여 논란이 되었던 것도 대면과 비대면이 충돌하는 문제였다. 기기사용이 서툴고 발권 외에는 어떤 문의도 할 수 없는 냉혹한 기기를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카운터counter에게서 발권했다고 추가 수수료를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배제하고 기기를 앞세워 일어난 논란이 비단 이 일 뿐이겠는가.
수납과 주문을 맡아주던 사람이 하나 둘 사라지고 인공지능을 장착한 무인기가 버티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그곳에 있던 ‘그들’의 향방이 궁금해진다. 매장은 인건비 절감으로 좋고, 고객들은 비대면이 편할지 모르겠지만 일하던 그들이 그 일을 잃어버리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어디서 무엇을 하기는 하는지에 이르면 사회가 비정해진다는 당혹감이 들던 것이다. 굳이 1차산업혁명 당시의 러다이트 운동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2차, 3차산업혁명이 진행되었고 그때마다 어떤 우려들이 있었지만 빠르게 4차산업혁명이 도래한 것을 보면 이 변화도 곧 아무렇지않게 받아들여지고 지금의 우려들이 그저 우려로 끝나버리면서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지도 모른다. 더구나 급격한 인구감소로 인해 어쩌면 AI가 부족한 인구를 대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적응이 빠르므로 그런 낙관을 가지는 것이 정신적으로 이로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이 낙관이 낙관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다. 정부는 일자리 창출에 골몰한 듯 보이는데 사회의 시스템은 역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선호하는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맞지않고 인공지능을 장착한 ‘무인’ 시스템은 있는 일자리도 감소시킨다. 세상의 일은 하나의 답을 가지고 있지 않고 하나를 충족하면 다른 하나의 결핍이 따르므로 고뇌도 끊이지 않는다. 더구나 플랫폼기업이 화두가 되고있는 지금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연구를 하고 어떤 기술이 진화하고 있는지 모르는 가운데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는 기계혁명은 빠르게 일어나고 있으나 언론의 문제의식은 보이지도 않는다.
AI와 인간의 동고동락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적이지는 않을 듯 하다. 이 글을 쓰는 중에 ‘집안(미국)에 설치한 스마트홈 기기가 해킹에 노출되었다’는 기사(SBS.12.15)가 등장했다. 과학기술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E=MC² 가 야기한 핵기술만이 아니다. 과학기술이 빅 브라더를 양산하는 아이러니한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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