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미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호기심을 동반한 나름대로의 기대로 들뜬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기다림’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자기 생일을 기다리거나, 사랑하는 연인들이 데이트 약속을 해 놓고서 약속 장소에 나와서 시계를 들여다보며 목을 빼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들의 기다림은 허망한 것이 아니다. 남북통일을 기다린다든지, 세계 평화를 기다리는 것처럼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다. 터미널이나 공항 대합실에서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도착할 손님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경우라면, 기다림은 단순한 기다림을 넘어서 간절함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기다림으로 성탄절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뜬금없이 선물보따리를 들고 나타나는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성탄절에 대한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영락없이 철없는 어린애 꼴이 되고 만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당연히 아기 예수님이다. 한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은 당연히 축하받을 일이다. 더구나 예수님의 탄생은 매우 특별했기 때문에 모든 인류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신비한 방법으로 태어나셨다. 모든 사람들이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태어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태어나셨다. 예수님께서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은 탓에 아담의 피를 이어받은 모든 인류는 원죄(原罪)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의 대가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동산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복되게 살 수 있었던 기회를 빼앗기고 만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사랑하셨던 인간들이 죄의 결과로 지옥에 빠져버린 것에 대해서 매우 가슴 아파하셨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시기로 작정하셨다. 한 사람의 죄인을 위해서 수만 명이 대신 죽어준다고 한들 그 죄가 없어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대신 죽어준다고 해도 그들 역시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의 죄를 대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어주셔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러주신 까닭에 우리의 죄는 다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통한 임신이 아닌,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숫처녀인 마리아의 몸에 직접 잉태하신 것이다. 그렇게 태어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사건을 기념하며 축하하는 날이 바로 성탄절(크리스마스)이다. 사람들은 가장 고결한 사랑을 추구한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사랑을 흉내 낼 순 없다. 모든 인간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래서 그 분의 사랑에 우리가 기뻐하며 감격해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인생 여정을 다 겪으셨기 때문에 그 분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신다. 너무나 인간적인, 아니! 우리와 똑같이 인간이신 하나님-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필자는 우리 교회 앞에 있는 식당에서 가끔 뼈다귀 해장국을 즐겨 먹는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뼈다귀들을 봉지에 담아서 개에게 갖다 주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런데 뼈다귀 해장국을 먹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뼈에 붙어 있는 살점을 뜯어 먹는 것이 너무 귀찮다는 것이다. 푹 고아진 돼지 등 사대에 붙어 있는 살점들을 대충 먹고 버리면 되는데, 내가 개도 아니고 그걸 일일이 쪽쪽 빨아먹기도 하고 뼈 속에 남은 살점들을 빼먹느라 애를 쓴다. 그러면서 개의 심정을 다소나마 이해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내가 직접 개가 된 것도 아닌데, 그나마 뼈다귀 해장국을 먹으면서 개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다. 그런데 그럴 일도 없겠지만 내가 진짜 강아지로 태어나서 개의 인생(?), 아니지 개의 견생(犬生)을 살게 된다면 개의 사정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더 잘 알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홀아비 사정은 홀아비가 알고,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겐 감지덕지한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 날! 거룩하지도 않은 우리가 거룩한 척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을 그 분이 보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필자는 우리 하나님이 너무나 인간적인 분이어서 좋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 하나님! 언젠가부터 우리에게서 사라져버린 그 인간미를 어디에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추위에 떨고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는 예수님처럼 참 인간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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