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긴 제목의 영화는 청순미를 자랑하던 이미연이 주연한 1989년도의 화제작이다. 경제성장이 지상과제이던 시절에 국민들의 삶이 주택마련과 자녀교육에 매몰되어 가던 세태를 풍자하며 주인공인 은주가 자살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났었다.
비슷한 설정으로 금년 초 막을 내린 TV드라마 “스카이 캐슬”은 상류층 자제들의 화려한 스펙 쌓기를 선보이며 상대를 죽여서라도 경쟁에서 이기려는 빗나간 교육열을 다뤄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는데, 필자가 존경해 마지않던 “正義(정의)와 平等(평등)의 使徒(사도)” 曺國(조국)조차도 “행복은 성적순”이라는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개월째 언론의 조리돌림을 당하며 망가지고 있는 걸 보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며 은주가 죽음으로 절규한지 삼십년이 지났어도 2019년 대한민국은 여전히 “행복은 성적순”이다.
그 시절엔 어느 정도의 경제적 성취를 이룰 때까지는 경쟁은 불가피하며, 얼마간의 불공정이나 기업에 대한 특혜 같은 것은 필요악이고, 분배나 공정, 기회균등 같은 요구는 자제되어야 한다는 공감대, 또는 체념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결과 지난 30년 동안 5천불 남짓하던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불을 넘어섰고 수출실적은 열배가 넘는 6,000억불을 달성하는 등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반열에 올라서는 꿈같은 일이 실현되었고, LPGA를 주름잡는 여자골프나 손흥민, 조수미. BTS, K-POP등 문화, 체육분야에서도 30년 전의 한국과는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의 도약이 있었다. 당연히 이러한 성공에는 “교육열”을 토대로 한 무한경쟁이 커다란 밑받침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살만해 졌음에도 정작 우리의 공동체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공정이나 배려, 관용 같은 가치는 남루해졌고 이해를 달리하는 구성원들의 관계는 더욱 각박해지고 대립이 심화된 것은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경제위기라며 책임을 최저임금 인상으로 미루는 자본과 언론도, 청년에게 뭔 수당이냐며 복지과잉을 비난하다가 노령연금이 적다고 혀를 차는 어르신들도 각박하기 짝이 없다. 진보정권임에도 파업을 외치는 노동계도, 난민을 거부하며 개념배우 정우성을 비난하는 애국지사들도 야박하기만 하고, 새로울 것도 없는 정쟁으로 일관하다가 끝내 청와대 앞에 자리 깔고 누운 야당 대표도, 걱정하는 척만 하는 반대당 의원들도 여유가 없고 궁색하기는 마찬가진데, 진영으로 갈려 네 탓만 해대는 소위 “여론”마저 저물어 가는 기해년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오래전에 중학생이던 큰집 조카딸이 우울증에 걸려 온 집안에 난리가 났었다. 아이는 이유없이 불행해졌고 그저 “행복하게 살고자” 열심히 일만 하던 형과 형수는 조카 보다 더 불행해져 버렸다. 만약 내 딸이었다면...,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내 아이에게 닥칠 수도 있었던 불행이었다. 내 딸 대신 저 애가 아픈 것 이라면 틀린 말인가? 형이 불행해 졌는데 동생은 다행이라니....
모든 이가 행복을 소망하고 행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불행하고 싶어 불행한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누군가는 소외되고 가난하며 장애가 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불균등한 기회, 불투명한 과정, 정의롭지 못한 결과가 용인되던 시절이 있었다면 지금 누군가가 누리는 부와, 행운 중 얼마인가는 소외되었던 이들의 몫이 아닐까? 너무 거창한가?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징그럽도록 국내외적으로 갈등과 혼돈으로 점철되었던 기해년이 저물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들고 있는 태극기가, 내가 켠 촛불이 혹시 누군가의 정치놀음에 속절없이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가진 것, 누리고 있는 것 중 진정 다른 이들의 몫은 없는지, 나의 주의와 주장이 그렇지 않아도 각박한 세상에 어려운 이들을 더 어렵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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